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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미 Oct 03. 2019

핑계 대지 않을 핑계

[커피 한 잔과 함께 읽는 글]

_커피 한 잔, 라떼는 아이스



처음 기타를 잡아본 건 19살이었다. 그때 나는 2층으로 된 단독주택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앞집, 옆집이 모두 아는 얼굴이었고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았다. 그중에 한 나이 지긋하신 아저씨가 오래된 기타를 하나 주셨다. 관심 있으면 해 보라고, 그냥 그렇게만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도 네, 하고 받아 들었다. 그냥 그렇게 나의 첫 기타가 생겼다.



나는 그 오래된 기타가 좋았다. 기타를 칠 줄도 모르면서 그냥 나무로 된 매끈한 바디를 품에 안고 기다란 넥을 손가락으로 짚고 있으면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TV에서나 보던 그런 화려한 누군가가 말이다. 하지만 제대로 기타를 연주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꽤나 버거웠다. 일단 손끝이 뭉개질 정도로 아팠고, 기본 코드를 외우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나는 고3이었다. 집에서 기타를 잡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낮에는 학교에 있어야 했고, 밤에는 잠을 자야 했으니까. 그렇게 나의 첫 기타와 멀어졌다. 두 번째 기타를 만난 건 10년이 지나서였다.



왜 그렇게 기타를 배우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진입장벽이 다른 악기에 비해 낮았기 때문이었겠지. 다른 악기에 비해 가격대가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고 인터넷 동호회만 몇 군데 찾아도 쉽게 배울 수가 있었으니까. 그 오래된 첫 기타는 관리가 안 된 탓에 버려야 했고, 기타 동호회에 들락거리면서 새로운 기타를 장만했다. 첫 기타만큼 새 기타도 좋았다. 직접 낙원상가에 가서 골라온 것이었고 어쨌든 새것이었으니까. 29살의 나는 새 기타를 품에 안고 되지도 않는 소리를 뚱땅거리며 꿈에 부풀었다. 꿈에서는 멋들어진 기타 반주를 하며 담담하게 노래를 부르는 내가 있었다.



나름 기초는 떼고 레옹의 주제곡이라든가 어쿠스틱 콜라보의 곡이라든가 연습했다. 반주가 되는 곡들이 하나둘씩 들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실력이 늘지 않았다. 왜일까, 고민하다 보면 밀가루 떡볶이 같은 무르고 짧똥한 손가락으로 시선이 갔다. 아, 정말. 손가락이 짧아서 그래. 나도 길고 예쁜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연습이 잘 안되면 수시로 짧은 손가락 탓을 했고 그러고 나면 의욕이 솟지 않았다. 의욕이 솟지 않으니 연습시간이 짧아지고 자연스레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러면 또 실력이 늘지 않는 탓을 짧은 손가락에게 돌렸다. 미안하다, 손가락. 너도 그저 유전 정보를 따랐을 뿐일 텐데.



아직도 그 기타는 내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도 때가 되면 줄도 갈아주고, 가끔 튜닝도 해놓고 오래 안 쓸 때는 커버를 씌워놓고 또 커버를 벗겨서 바람을 쐬어주기도 하는 둥 나름 너를 잊지 않고 있다는 표를 내면서. 그래 봤자 방치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덜려는 발버둥이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니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울 때도 그랬다. 손가락이 짧아서 닿지 않는 건반 때문에 연주가 안 되는 거라고. 그 핑계를 찾아낸 순간 놀랍게도 실력이 더 늘지 않았고 실력이 늘지 않으니 재미도 없었다. 10살의 나와 19살의 나, 29살의 나는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참으로 한결같은 사람이구나, 나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에 한숨이 나왔다.



핑계를 찾게 되면 무슨 일을 하든 당연히 도망치게 된다. 결국 핑계라는 게 한계에서 도망치기 위해 미리 깔아놓는 포석이나 다름없었다. 최근에 다시 기타 연습을 시작했지만 지금의 나라고 크게 다를까. 나는 또 무슨 핑계를 찾을까. 핑계 좀 그만 찾을 그런 핑계는 찾지 못하는 걸까.



아, 정말 손가락은 왜 이렇게 아픈 걸까. 클래식 기타로 바꾸면 좀 나을까....... 앗, 또 시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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