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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타임 Aug 28. 2022

인생 변수, 하필 휴가.

호텔에 4일을 갇혀있었다.

61층 호텔방은 오션뷰도 파크뷰도 시티뷰도 방향 따라 골고루 보여줬지만 그것도 갇혀서 보자니 따분했고 아름다움은 퇴색됐다.

멍~ 하고 앉아 있기는 응접실 쪽 시티뷰가 좋았다. 낮이고 밤이고 차가 지나다니는 모습이 가장 사람을 멍~ 하게 해 줬다.

3일쯤 지나니 지금껏 호텔 여행을 하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증상이 나타났는데 창문을 열지 못한다는 사실이 인식이 되자 그때부터 때때로 질식하듯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잘만있을줄 알았더니 넷플릭스에 영화 한 편 억지로 보고, 책 대여섯 장 겨우 읽고, 원탁 테이블 가운데 올려둔 핸드폰은 평소와 다르게 재밌지가 않았으며,

몰입하기 좋은 글쓰기도, 수학 문제 풀기도, 심지어 식사하는 것조차도, 그 무엇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어쩔 줄 몰라하다 보면 어느덧 창밖의 뷰는 야경으로 바뀌어있었다.


셋째 날 저녁 배달음식을 받기 한 시간 전 호텔 바로 맞은편 공원에 있는 야외 카페에 잠시 나와 앉았다.

시원한 바람.., 그런데 여름은 어디 가고 가을바람.

애석하고도 황홀한 기분과 그리고... 정말 망한 여름휴가.


올여름 인생의 찬스처럼 동생과 단둘이 휴가를 오게 됐다. 매년 늦은 가을 둘이서 여행을 하곤 했지만 이렇게 선물 같은 여름휴가를 다른 일행 없이 단둘이 보내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첫날기분 좋은 산책 후부터였다.

동생 컨디션이 급격히 다운되더니 그때부터 침대에 누워 꼼짝을 못 했다.

어린 시절부터 몸살을 앓으면 가족 중 제일 지독하게 앓던 아이.

빵순이답게 빵집 리스트만 열개를 가지고 온 애가 노천에서 커피 한잔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침대에 갇혀버렸다.


인천 송도. 참 서운하네... 잘 계획된 도시와 멀리 바다가 어우러져 시원시원한 느낌을 주는 송도는 올 때마다 매번  이런 변수들로 날 곤경에 빠뜨리니, 내 아무리 미신을 믿지 않는다 해도 이 정도면 정이 떨어지고 서운해서 두 번 다신 오지 않겠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변수. 변수 앞에 이번에도 속수무책이다.

창밖을 보며 변수들 앞에 나의 마음가짐이 무엇이어야 할까 잠시 생각했다. 아직은... 그 어떤 지혜도 얻지 못한 채 나의 마음가짐은 그저 생떼이다.


그렇게 나의 소중한 여름휴가를 호텔방에 다 날려버리고 일상에서 다시 맞은 주말.


지난번엔 아니었는데 오랜만에 찾은 카페의 4 way 에어컨은 그 어느 자리도 바람을 피할 수 없게 제기능을 다했다.

요즘 부쩍 두통이 자주 일어 심기가 불편하다.

에어컨 바람을 이렇게 십 분만 맞게 된다면 또다시 두통을 겪을게 분명하다.

삼십 분도 채우지 못하고 카페를 나와 공원을 걸었다.

에어컨 바람은 실외에 나가서도 한동안 계속 날 불쾌하게 했다. 차가워진 내 살갗에 더운 수증기들이 덕지덕지 달라붙는 기분이었지만  '내 자리'에 도착하는 동안 잠시 불편했던 컨디션이 돌아왔다.


공원에 개인 자리가 어딨겠냐만 나에겐 내가 찜해둔

'내 자리'가 분명 있다. 자리에 앉자, 다 큰 플라타너스 잎이 자연풍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내는 소리만으로도 청량감이 가득이다. 이제야 제대로 시원하다.

처음 이 공원이 생길 때는 느껴지지 않던 풀향들이 이젠 공기에 가득 느껴진다.

식물의 뿌리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 흙과 어우러져 내는 향기. 큰 숨을 들이쉬어 본다. 아~ 좋다.

휴가를 괜히 멀리 갔다. 이렇게 내 자리에 앉아

하루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을.


코로나 이후 굳이 좋아진 점을 하나 찾자면 여름휴가를 준비하는 게 더 이상 '일'이지 않다는 것이다.

해외여행을 앞둔 그 설렘을 무엇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한편으론 모든 게 일이었다. 여행지 선별부터 그곳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는 일,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변수가 없길 마음 졸이는 일, 현지에서의 여행 속의 여행을 예약하는 일, 가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일 등등..


코로나 속 여름휴가는 그 모든 '일'로부터 자유를 줬다.

해외로 여행을 가지 않게 되니 여행을 앞두고 준비할 것도, 크게 설렐 것도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기분이 한편으론 편안했다. 말 그대로 쉬다가만 오면 될 일.


그런데 그 조차도 올여름엔 안 될 일이었나 보다.

오죽하면 휴가가 끝난 게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동생을 걱정하느라 다른 마음이 들 여지가 없었는데 돌아온 후에는 억울한 마음이다.


인생의 변수.

공원 '내 자리'에 앉아 호텔에서 접어두었던 그 생각을 다시 펼쳐본다.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지키려다 다 못 지키는 일들은 자연스럽다. 그러한 일에서 적당히 보람을 찾고, 적당히 아쉬움을 달래는 자세까지는 터득이 된듯하다.

하지만 변수 앞에 그 어떤 계획도  펼치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질까 봐 그게 가장 두렵다.

아직은 그 모든 변수들 앞에 떼쓰고, 신경질을 내고, 누군가를 탓하고 철없기 그지없는 모습이지만 언젠가는 변수에 대한 마음도 넓어지길 바래본다.

여러 변수들에 인생이 자주 막혀 해탈에서 오는 아량이 아니라 경험들이 나에게 준 지혜 덕에 생긴 아량이었으면 좋겠다.

또 그러한 날에는, 변수를 통해 얻 반대급부들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 속에 삶을 이어가길 바란다.

얕은 소견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웠던 나의 계획들이 변수를 통해 더 넓은 시야를 갖길 바란다.


어느덧 해는 지고 있고, 바람은 멈췄다. 낮에 소풍을 온 사람들이 저녁 운동을 나온 사람들로 체인지되었다.

난... 국수나 먹으러 가야지. 가득 삶아 많이 먹을 테다.

휴가를 망친자. 당분간은 뭐든 제멋대로 해도 다 허용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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