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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평야 앞에 서서

by 최유나

“유나야. 내가 천주교 이주사목위원회 사업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있는데, 네가 연구자로서 이 사업에 필요해 보여서 연락했어. 위원회 분들에게는 천주교 신자인 연구자가 있다고 말해두었는데, 참여가 가능할까?”





갑작스러운 연락이었다. 평상시 천주교에 애정을 갖고 있긴 했지만 개신교 신자이신 지도교수님이, 천주교에서 진행하는 사업의 자문위원이라는 것은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무언가 신기한 느낌이었는데,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겠냐는 질문까지 하시다니. 이것은 나로서는 정말 반가운 일이었다. 교수님은 사업 예산상 내게 지급되는 연구비가 많지 않을 수도 있다며, 그 점도 함께 고민해서 결정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천주교’라는 단어가 앞에 붙는 일이라면, 그 금액은 나에게 이미 판단의 기준이 아니었다. 나의 작은 기술과 지식이 교회의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꺼이 사업에 함께 하겠다고 대답했다.

며칠 뒤, 사업 담당자 선생님들과의 첫 회의가 열렸다. 담당자 선생님들은 내가 함께 하기로 결정한 것에 고마움을 표시하며, 그동안의 사업 흐름과 앞으로의 방향, 그리고 내가 맡을 역할에 대해서도 상세히 안내해 주셨다. 이주사목위원회에서는 미등록 이주민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 중, 위중한 병으로 인해 많은 의료비가 필요한 유아를 지원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에게 맡겨진 역할은 이 사업의 효과성을 검증하고 필요한 자문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은 아직은 어색한 호칭인 ‘박사님’이라고 나를 부르시면서, 본인들이 그간 갖고 있던 궁금증과 어려움에 대해 질문했고, 나는 지금까지의 지식과 경험을 최대한 동원해서 답을 드렸다. 다행히 내 설명이 선생님들께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이것은 박사학위를 받은 뒤, 처음으로 외부 기관에서 ‘전문가’로서 역할을 맡는 순간이었다. 그 ‘처음’이 교회 산하기관이라는 것은 나에게 단순한 우연은 아니었다.

회의가 끝날 무렵, 담당자 선생님들은 연구비가 충분하지 않아 소액만 드릴 수 있다며 미안해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하느님의 보살핌 속에서 학위를 얻었으니, 교회를 위한 뜻깊은 사업에 함께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나에겐 큰 기쁨이라고 말씀드렸다. 이러한 나의 말에 담당 선생님들은 ‘하느님이 보내준 사람을 만난 것 같다’라는 과분한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를 그분들에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상황과 서사를 만들어주셨다.

박사학위논문의 최종심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올해 여름의 어느 날, 몇 년간 서신으로만 인사를 드리던 수사님을 직접 뵈었다. 수사님은 나를 잠시 바라보시더니 자매님이 분명히 교회 안에서 할 일들과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 역시 교회에서 크든 작든 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학위를 받은 이후, 전보다 바빠진 일상 속에서 예전에 하던 전례 봉사나 ‘청년 성서모임 봉사자’ 같은 역할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다며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난 이주사목위원회의 사업은 하느님이 나의 상황에 맞게 열어주신 또 다른 모습의 봉사였다.








내가 이 사업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는 것은 내년부터라고 한다. 하느님이 앞으로 나를 어떤 자리로 이끌어가실지,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이라는 길목에 서 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드넓은 평야가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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