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책상 앞에는 성녀 에디트슈타인의 상본과 여러 성경 구절들이 붙어있다. 여러 행사에서 받았던 말씀사탕 중에 특히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도 있고, 본당 신부님이 쓰신 캘리그래피 작품도 있다. 이 구절들은 공통점이 있는데 우리가 ‘빛’의 자녀라는 점, 그리고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라는 내용들이다.
나는 걱정이 많고 겁이 많다. 좋게 말하면 조심스러운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용기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특별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는 마치 스스로 동굴을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고민 안에 갇혀버리고 끝없이 침잠한다. 그 침잠의 깊이가 스스로 감당 가능할 정도면 그래도 다행이다. 그러나 가끔은 어떻게 수면 위로 올라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도 꽤 있었다. 보다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한 고민 그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상황이 되어버리니 나에게 있어 ‘고민’이라는 것은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이 되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고민 안에 갇혀버리는 나 자신이었다.
세례를 통해 ‘빛’의 자녀가 되었고, 세상에 작은 빛을 발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 것은 내 평생의 꿈이자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침잠하는 동안 나는 빛의 자녀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빛을 흡수하여 집어삼켜버리는 어둠이었다. 차라리 내가 ‘어둠’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면 좋으련만, 나는 내 상태를 또렷이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빛을 향해 나아가고 싶음에도 오히려 어둠만을 담고 있는 내 모습은 또 다른 괴로움과 어둠을 내 위로 덧쌓아갔다. 고민은 어둠이 되어 나를 둘러쌌고 나는 어둠 속에서 다시 어둠이 되었다.
이 같은 경험을 오랜 시간 동안 한 끝에 나는 겨우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했다. 걱정과 고민, 그리고 그로 인한 지나친 생각들을 끊어버려야만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약한 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 생각들은 마치 내 의지와 노력도 비웃는 듯 점점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받았던 말씀 사탕들을 뒤졌고, 그 중에서도 유약한 나를 특히 보호막으로 감싸줄 수 있는 몇 개의 성경 말씀들을 찾아냈다. 그것은 나의 방패가 되어주었다.
내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있는 성경구절은 일본의 바오로딸을 방문했을 때 뽑았던 말씀사탕이다. 거기에는 에페소서 5장 8절의 구절이 적혀있다. 일본어로 “빛의 자녀로서 걸어가십시오(光の子として歩みなさい)”라고 적힌 구절을 보면서, 나는 내 머리 위로 하느님의 쏟아부어주는 황금색 빛이 가득 쏟아지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어둠이 이윽고 힘을 잃고 내 몸도 서서히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한참 그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나면 매 순간의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조금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노트북에 붙어 있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 27)”의 구절에 눈이 닿으면 하느님이 큰 손으로 내 손목을 붙들고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한 번씩 나를 돌아보며 따뜻한 미소를 건네며 말이다.
내가 빛의 자녀로 태어난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 곁에서 주님이 “힘내라!”며 응원하고 있는 것도 안다. 그러나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간격은 너무나 컸고, 게다가 나는 그 당연한 사실을 자주 잊고 만다. 그런 나에게 눈이 닿는 곳에 있는 성경 구절은 그것 자체로 더없이 안락한 품이다.
개인적으로 2025년은 박사학위를 마쳤고, 연구자와 교수자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한 해였다. 2026년 올해는 그동안 배운 것들을 좀 더 나눠야 할 때가 되었다. 새로운 길 위에서 발을 한 발짝 내딛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나는 여전히 유약하지만 이제는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하느님의 빛을 믿고, 에페소서 5장 8절의 구절의 말씀처럼 ‘빛의 자녀’로서 아름답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할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