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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Oct 12. 2022

나도 헌혈하고 싶다

 “아, 좋겠다. 부럽다.”


   나와 엘리사벳 씨는 ‘헌혈의 집’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 왜소한 남자 고등학생을 바라보며 ‘좋겠다’라는 말을 연거푸 뱉었다. 자신의 소지품을 사물함에 넣고 침대 쪽으로 가는 것을 보니, 헌혈 가능 판정을 받은 모양이었다. 저 아이는 저렇게 말랐는데도 혈액의 철분 수치가 양호했나 보다. 나와 엘리사벳 씨는 조금 전에 철분 부족으로 ‘헌혈 불가 판정’을 받은 참이었다. 내 피를 기꺼이 내어주겠다는데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참으로 속상했다. 물론 나의 건강을 위한 것이지만 말이다.

  헌혈실 안쪽에는 우리와 동행한 브루노 씨가 팔에 주삿바늘을 꽂고 편안히 누워있다. 저분은 서른 번 넘게 헌혈을 했다던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운동을 열심히 하신다던데, 나도 운동을 열심히 하면 철분 수치를 높일 수 있을까? 팔에 바늘을 꽂고 헌혈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나와 엘리사벳 씨는 부러운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봤다.     




  내가 헌혈에 관심이 생긴 것은 몇 달 전 성당의 공지를 받았을 때부터였다. 다니고 있는 성당의 초대 신부님이 입원 치료를 받는 중인데, 수혈할 혈액이 제법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워낙 연세가 높으니 혹시 헌혈이 가능한 사람들은 신부님 이름으로 ‘지정헌혈’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초대 신부님은 직접 뵌 적이 없고 성당에 신자들은 많으니 나 말고도 신부님을 위해 헌혈할 사람들은 당연히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은 계속 쓰였다. 공지를 요청한 신부님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성당에서 함께 봉사 중인 브루노 씨가 성당의 같은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같이 헌혈하러 가지 않겠냐고 권했고, 그렇게 나는 헌혈을 하게 되었다.



   고3 때 이후 오랜만에 한 헌혈이 꽤 뿌듯했기 때문에 앞으로 종종 헌혈을 하겠다고 그날 다짐했다. 그리고 그 마음대로 다시 ‘헌혈의 집’에 갔지만, 낮은 철분 수치 때문에 헌혈하지 못한 것이 벌써 연거푸 두 번째였다. 여자들은 철분이 부족해서 헌혈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 바로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니 팔을 뻗어 피를 나눠주고 있는 저들이 너무나 부러울 수밖에.

   그러나 사실은 신부님 때문이 아니더라도 몇 년 전부터 헌혈에 관심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도 수혈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전의 나는 교통사고 같이 외상 응급 환자들만 수혈을 받는 줄 알았다. 그런데 외과 수술을 한 부모님도 수혈을, 그것도 며칠 동안이나 받게 된 것이다.

   수술이 잘 끝났는데 왜 수혈을 받아야 하냐는 내 질문에 담당 간호사는, 수술장에서 출혈이 많았던 경우는 입원실에서도 수혈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에 부모님이 받은 수술이 그렇게 큰 수술이었구나 하는 당혹감과, 누군가 나눠준 피 덕분에 부모님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겠다는 감사한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다.


   혈액형을 맞춰서 수혈해도 타인의 혈액이기 때문에 환자에게 알레르기 반응이 있을 수 있으니, 환자의 얼굴에 두드러기 같은 것이 보이거든 바로 알려달라고 간호사가 말했다. 간호사의 그 말은 그때의 다급했던 내 마음과 뒤섞여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신부님을 위해 헌혈을 해달라는 공지를 보고는 부모님을 간병하며 꽤 오랫동안 병원에서 생활했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렸던 것 같다. 어쩌면 이토록 헌혈이 하고 싶은 것은, 갈급한 마음으로 부모님의 회복만을 바랐던 그때의 나를 아직 위로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헌혈을 마치고 나온 브루노 씨는 또 헌혈에 실패하여 의기소침하게 앉아있는 나와 엘리사벳 씨를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그러나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철분 수치를 올리기에는 고기가 좋으니 삼겹살을 먹으러 가자고 우리를 다독였다. 유쾌한 그의 말에 나와 엘리사벳 씨의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선한 마음의 그들과 먹는 삼겹살이 내 혈액의 철분을 쭉쭉 올려주면 좋겠다. 다음에는 세 명 모두 헌혈에 성공할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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