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다른 곳에서 보다
등산은 왜 할까.
난 왜 같은 고양이인 우리 고양이들을 자꾸 찍을까.
똑같은 내 얼굴을 왜 자꾸 거울로 볼까.
누가 날 찍어주느냐에 따라 다른 내가 사진 속에 있을까.
내가 '열패감'이란 걸 느낀 지는 아주 오래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열패감이라는 단어 자체를 잘 쓰지 않는다. 언젠가 20대의 노트에서 '짙은 열패감'이라고 써 놓은 것을 봤다. 뭐에 그리도 열등하면서도 실패했다는 느낌에 괴로워하고 우울해하며 지냈을까. 내가 수퍼스타가 아니라고, 내가 쇼핑몰에 나오는 여자들처럼 마르고 하얀 피부를 지니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들으면 '우어'하는 기업의 사원증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고, 잘 빠진 글을 쓰지 못했다고, 다른 젊은 20대처럼 찬란하게 보내지 못한다고?
때론 내가 구할 수 있는 최고로 예쁜 옷을 입고 새로 머리를 하고 젊은 이(? 이 단어가 늙어보이는 건 왜일까?)들의 거리라고 하는 곳에 가서 카페에 가서 분위기도 잡아보고 사진도 찍어보고 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다른 커플들을 보며 우울해하고, 더 날씬하지 않다고 더 예쁘지 않다고.
다소 지금은 귀여워보이는 이유들로 난 조금 우울해하고 열등하고 패배했다는 느낌을 안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이런 귀엽고 사소한 열패감보다는 더 컸던 건 커리어에 대한 실패와 실망감때문이었다. 일단 그 당시의 실패가 얼마전까지의 나에겐 제대로 하는 거 없는 실패뿐인 인생의 발자국이라고 보았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진심으로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 고생한 아이이군, 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물론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한 적은 없는 것같다. 공부잘하는 아이였고(시골에서) 왠만한 대학에 들어갔지만 만족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보러 다녔던 수많은 시험을 보러다니면서 서울 곳곳의 고등학교는 다 가본 것 같고 또 무감각해질 정도로 실패하고 떨어졌다. 지금 내가 나의 실패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부끄러워하든 자랑스러워하든 세상이 돌아가는 방향이 바뀌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이가 좀 드니(이 말이 꼰대같지만..) 인생이 실패든 성공이든 중요한 건 그런 단어가 아니라는 거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에 도취되어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사람들도 많이 목격한다. 공고해보이던 그들의 세상이 작은 창문이 조금씩 깨지더니 위태로워지고 그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목격하게 되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정부든.
실패와 성공은 그 이후가 더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지금은 나의 작고 잦고 끊임없는 실패들이 글감이 되기도 한다. 근데 실패를 실패라고 인식하고 쓰라림과 숨기고 싶은 마음으로 덮어놓기만 하는사람이 여태까지의 나였다. 그러니 그 실패를 만회할 만한 뭔가가 없으면 난 조바심을 내고 그런 급한 마음에 무리하게 되고 '난 이 정도 밖에 안되나봐.'라며 절망하고 계속되면 나의 마음은 지치고 그런 마음에서 좋은 글은 나오지 않고, 그럼 또 '난 이 정도 밖에 안되고 글도 진짜 못 쓰네.'라며 땅굴을 지하암반수 찾아가듯 찾고.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지금은 합리화도 조금 섞였지만(정신건강을 위한 약간의 착각과 약간의 망상과 약간의 합리화는 얼마나 유익한가!) 나의 실패들이 보이지 않았던 내 길을 찾는 과정이고 어린 아이가 달리기에서 넘어지는 그런 실패라고 조금은 안쓰럽고 귀엽게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려고도 한다.
세상은 낙원이 아니기에 재화도 부족하고 대학 졸업생에 비해 좋은 일자리는 매우 적다. 그리고 나오는 상품보다는 히트 상품이 당연히 매우 소수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성공만 하고 싶다는 생각은 너무도 비현실적이다. 때론 이미 구조상 실패가 당연한 경기도 존재한다.
그러니 실패와 성공의 기준을 세상의 기준에만 따른다는 건 나 자신에겐 친절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 기준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것들도 나는 실패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으니 세상보다 내가 나에게 가혹했지. 예를 들면 식물을 키우면 항상 죽이는 난 식물킬러라고 생각했다. 근데 애초에 길거리에서 파는 식물이 뿌리가 제대로 있지 않은 식물도 많아 내가 그런 식물을 키웠을 수도 있고 또 식물이 죽어나가면 그 원인이 뭐였는지 알아보고 개선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또 얼마전엔 식물을 잘 키우는 엄마의 다육이를 데려왔는데 또 죽었길래( 한 때 나는 다육 식물에 미쳐서 많이도 죽였다....) 난 역시 안되나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본가에 가니 엄마가 데려간 애 살았냐고 물어보셨고 난 죄책감으로 죽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엄마도, 식물을 잘 키우는 엄마도 엄마 게 죽었다고 했다. 식물킬러는 그렇게 마음의 합리화를 겪고 오랜 고민끝에 허브식물을 데려왔고 애정을 갖고 애지중지 조심조심하며 키우고 있다.
실패를 다른 곳에서 바라보니 참 달가운 녀석은 아니지만 'again!' 이라는 단어로 보인다.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시도하면서 계속 실패한다고 절망하는 건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많고 쉬운 실수지만 실패 자체를 가리고 숨긴다면 다르게 'do it again' 해 볼 수 없을 것이다. 어디선가 기사로 읽은 것도 같고. 실패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실패의 원인을 알아 보는데 훨씬 소극적이라고. 어떻게 보면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한데 말이지.
아무일도 안되고 그 무엇도 안될 때 정말 사소한 일도 되는 일이 없었는데 주위의 도움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 웃음이 나왔다. 언제까지 안되는가, 한 번 해볼까. 진짜 언제까지 이럴 건지 순수한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런 실패의 사인이 내게 다른 길을 열어주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건 길이 아니니 내 머리채를 잡고 '글을 써라' 라고 짓궂은 신이 날 의자에 앉히는 장면도 상상되기도 했고.
실패하면 절대 안 돼.
한 번 미끄러지면 아예 낙오되는 거야.
발전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이런 세상의 말소리와 내 속의 목소리를 조금은 귀막고 실패라고 누가 날 볼지라도 그냥 again 을 선택해보련다.
실패= 다시, but 다르게
등산은 왜 할까. -> 아래서만 보면 올라가는 길의 공기도 못 마시고 위에서 보는 느낌이 좋으니까?
난 왜 같은 고양이인 우리 고양이들을 자꾸 찍을까 -> 시시 각각 변해. 다르게 보여. 다른 각도로도 한결같이 사랑스럽다.
똑같은 내 얼굴을 왜 자꾸 거울로 볼까. -> 어떤 날이냐에 따라 다르고 어떤 각도로 보는지도 다르다. (하지만 항상 고정된 각도로 봐서 거울 속 나와 사진에 찍힌 내가 다른가보다.)
누가 날 찍어주느냐에 따라 다른 내가 사진 속에 있을까( 다른 각도로 찍으니까? 수많은 셀기꾼들은 잘 나오는 '각도'를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