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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bow Mar 23. 2021

21/100 등장인물과 함께 하는 여담 - <연인>

어머니

21/100 등장인물과 함께 하는 여담 - <연인>  어머니 


‘어머니’란 어떤 존재일까.  한국에서는 하도 효 사상을 가르치는 바람에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불만을 가지거나 못 된 말을 하면 무조건 그러면

안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효’ 사상을 그다지도 강조한 것은 가장

본능적으로 애증의 관계가 부모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성장은 부모없이(혹은 부모 역할 없이, 어머니의 역할 없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 육체노동으로 한없이 고생을 많이 하신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성당에서 한 수녀님에게 인사시킬 때 나보고 ‘네가 진짜 잘 해야지’.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셨다. 거기에 아빠는 애한테 부담 되게 무슨 그런 말을 하냐고

내 부담을 덜어주셨다.


<연인>의 소녀의 어머니는 큰 아들에 대한 짝사랑보다 더 지독한 의지와 사랑,

아버지 대신 아들을 바라보았던 어머니다. 자신의 딸을 육체적으로 사랑하고

그 대가를 받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면서 젠틀하게 예의를 갖춘 중국인 남자와

같이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며 그를 조롱하기도 한다. 그런 자신의 가족의 모습에

처참해진 소녀와 그런 수치심을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반박하지는 못하는

바보같은 모습의 청년.


소녀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어머니에게 묻는다. ‘왜 우리(자신과 둘째 오빠)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으세요?’  어머니는 퀭한 두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소녀도 관객도 다 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소녀가 중국인 남자와

잠자리를 하면서 받아오는 물질을 거절하지도 않으면서도 자신의 딸이 창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어머니.


그렇게 사랑하는 큰 아들은 오랜 만에 찾아와서는 집안의 모든 돈을 가지고 간다. 이건

베트남에 사는 프랑스 가정이나 한국의 어느 시대 어느 비극적인 가정이나 비슷해 보인다.

‘어머니’란 존재는 성모 마리아처럼 희생을 치러도 아이들을 위해야 한다는 강박이 존재하는

단어처럼 보인다. 숭고해야 하고 그 누구보다도 모성애를 강조해야 하는. 조금이라도 모성애가

존재하지 않으면 당연히 돌팔매질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은.


하지만 숭고한 어머니는 누구나 가졌으면 하는 어머니인 판타지이지, 선뜻 되고 싶지는 않을 존재 일 것이다. 소녀는 어머니가 어떤 어머니이든 그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숭고한 위치로 치켜 세워지거나 아니면 비난을 받는 어머니의 존재는 이분법적인 폭력적 시각이

만들어 낸 존재다.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 어머니가 있는 가정에서 항상 비극이 싹트는 것을 본다.

그리고 항상 아버지의 자리는 비어 있다.


내가 고양이를 키우면서도 이 고양이들에게 나 자신을 ‘엄마’라고

칭하지 않는 이유는 고향 집에서 키우던 개들에게 엄마, 아빠가 나를 언니라고 칭했던 이유도

있고 그 ‘엄마’라는 명명이 너무도 무거워서 인 것도 같다.  


어머니라고 아버지라고 어찌 완벽하겠는가, 자녀라고 항상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니

쌍방과실의 비극들이 너무도 많이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극’을 쓰는

방법의 불문율이 있다. 바로 ‘부모, 자식 사이에 비극을 만들라’는 원칙이다.


술에 마구 취해 중국인 남자를 수치스럽게 하다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미안하다고

하던 <연인> 소녀의 어머니가 지독하면서도 참 가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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