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onbow Mar 24. 2021

1/100 등장인물과 함께 하는 여담

오이디푸스

운명을 피하려고 하는 , 반드시 운명의 수레바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신탁때문에

자신의 아버지에게 버림받는다. 라이오스왕은 아들의 발목을 뚫어 가죽끈으로 묶은 뒤

산에 버렸다. 우연히 아기를 발견한 목동은 자식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이웃 나라 왕과 왕비에게

데려다 주었다.  친아버지가 가죽끈으로 발을 꿰었기때문에 이름도 ‘부어오른 발’이라는 뜻의 오이디푸스가 된다. 오이디푸스가 성장하며 자신에 대한 신탁을 알게

되고 그 운명을 피하려고 집을 떠난다. 운명을 피하고자 집을 떠나는 오이디푸스는 오히려

점점 자신의 운명과 오히려 가까워진다.  삼거리에서 시비가 붙어 갓난아기일 때  자신을 버린 친아버지를 죽인다. 그리고 스핑크스의 문제를 풀어 왕이 된다. 그 당시 왕은 선왕의 부인과 혼인을 맺어야 하는 관습이 있었기에 오이디푸스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어머니와 혼인한다. 이 역병이 계속되자 앞을 볼 수 없지만 미래를 점치는 테레이시아스에게 국운을 점치는

오이디푸스. 장님, 테레이시아스의 말을 들으면서 오이디푸스는 점점  자신이 피해가려고 했던 운명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는 프로이트가 인간 본연의 동일시, 본능적 욕구

의 동기, 공포 등의 집합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이름지었고 오히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오이디푸스 비극보다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한것 같다.


나  또한 오이디푸스 비극을 제대로 읽은 것은 대학교 4학년 때였다. 이미 취업이 된 동기들도

좀 있는 편이었고 대학원 준비를 하겠다고 진로를 정한 친구들도 있었다. 넋놓고 있다가 갑자기

분위기에 맞춰 취업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동시에 이게 아닌 것도 같았다. 그 와중에 듣고 있던

전공 수업의 과제는 내 능력치를 훨씬 넘었다. 햄릿처럼 ‘죽느냐, 사느냐’하는 문제처럼 내 운명이

그냥 알 수 없는 누군가의 합격통보로 결정날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전공 수업 과제로 읽은 오이디

푸스 비극은 모든 잡념들을 잊게 했던 독서의 경험이었다. 오이디푸스 비극의 해설을 읽는 순간은

어지럽던 머릿속이 아주 명쾌하게 정리되는 기분이었고 나도 모르는 내 운명의 실이 나를 이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 운명의 실을 붙잡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다. 그러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고통스럽기만한 20대 후반을 보내야 했다.


<오이디푸스 > 마지막 장면에는 오이디푸스는 눈을 뜨고 있어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했던 자신의 눈을 찌르고 황야에서 끝없이 방랑하는 벌을 스스로에게 준다.


오이디푸스처럼 강력히 자신의 신탁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 멀리 떠나온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 내 가치를 증명해보이기 위해서 내가 아니

어도 금새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수 있는 불안한 직장생활을 했고 그 안에서 지독한 인생

경험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 4학년 때 마지막 기회라고 우연이 내게 안겨준 <오이디푸스>가 주

었던 운명의 가느다란 실이 나를 글쓰는 길로 인도했다.


딱 30살, 다시 학생이 되어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며 수업을 듣고 고전의 등장인물들을

분석하고 미약한 작품이라도 써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시간들이 광야처럼 내게 펼쳐졌다.


사실, 고백하자면 고등학교 때 까지는 그저 공부를 잘하는 시골의 학생이었다.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 학교 선생님이 바라듯 선생님이 되어 다시 학교에서 학교로 다니며 시집을 잘

갈 수 있는 배경을 만들고 그저 그런 나랑 비슷한 남자를 만나 애들을 낳고 대출을 받아

집을 마련하고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월급과 그래도 여자로써 육아휴직이니 뭐니 다 잘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인생을 살기를 염원했다. 내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그래서 그런지 내가 진짜로 품었던 꿈은 더 날고 기는 사람들이 있기때문에, 능력만으로는

안되는 정치질을 하는 곳이기때문에, 예술이란 길을 선택해서 너무 못살게 된 예가 너무도

많기때문에 키우기도 전에 시들어져갔다.


한 창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다고 아침, 저녁으로 음악실의 빈 시간마다 혼자 베토벤과 쇼팽을

쳐댔던 때는 아침잠많고 의지박약인 내게 작은 선물같은 시간이었다. 음악실은 추웠고 아침에

잘 못 일어나는 내가 눈을 번쩍 떠서 학교로 가게 했다. 계속 쇼팽의 에튀드 중 한 곡만 쳐댔기

때문에 베토벤을 치는 날이면 등교하던 학우들이 오늘은 음악 바꼈다고 소소하게 얘기하기

했다.


고3이 되기 전 음악에 생각보다 진지하다는 것을 안 부모님은 음악과 예술을 하다 망한(?)

인생이 된 사람들의 예를 하루에 하나씩 모아 왔다.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그 사람들이

정말 기타를 쳐서, 바이올린을 켜서, 음악을 한다고 해서 인생이 망했는지 는 모른다. 어찌

됐든 부모님의 큰 뜻은 부모님처럼 고생많이 안하고 좀 나은 생활을 하는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었다.


피아노를 안치기로 하고 눈물이 멈추질 않아 애를 먹었다. 음악선생님은 내 열정이 별로

뜨겁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고 한 친구는 피아노 전공해봤자 구멍가게같은 학원하나 운영

하기 힘들거라고, 잘 한 선택이라고 했다.


대학만 가면 마음대로 하라던 부모님의 말은 ‘대학 가봐라, 마음대로 되나.’라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대학이든 공부든 뭐든, 내 마음 속에 엔진은 그 때 이후로 멈춰졌다.


아마  대학교 4학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읽었을 때, 그 순간 모든 세상의 잡음이

사라졌을 그 때, 아니면 때때로 책을 읽을 때나 어떤 음악을 들었을 때, 그 엔진은 조금씩

반응 했을 것이다.


그리고 녹슨 엔진을 다시 고치기 위해서 다시 학교에 갔을 때, 또 다시 만난 것은 <오이디푸스>

였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 거린다’ 라는 시를 쓴 황지우 교수님이 물었다.


-오이디푸스의 가장 큰 라이벌은 누구인가?


강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개의치 않는 교수님은 몇 명에게 물어보고 답을 말해줄 생각이

없으셨다. 강의실의 모두에게 묻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은 당황과 의문으로 가득했다. 오이디푸스, 저 불쌍한 인간이 파렴치한 일을 저지르

게 되는 그 과정이 오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 신기할 뿐, 그리고 줄거리를 다 알고도 스릴

감이 넘치며, 자살을 하고 역병이 든 자극적인 모습들은 다 무대 뒤에서 이루어지는 데도

팽팽하게 극의 긴장감이 구성되는 이유만이 궁금 한 내게 당혹감이 밀려왔다.


항상 살아오면서 이런 당혹스런 순간은 나를 절대 피해가지 않고 나름 큰 이벤트를 만든다는

것을 온 나는 답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모든 뇌세포를 굴리고 부르고 하는 데 갑자기 번뜩하고

하나의 이름이 스쳐지나갔다.


-테레이시우스


작게 대답했지만 이를 들은 황지우 교수님은 날 몇 초 째려보더니 강의를 이어가셨다.


오이디푸스는 마지막에 눈을 찌른다. 두 눈을 뜨고도 자신의 신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두 눈 뜨고 동침을 한 왕비가 어미임을 몰랐다. 하지만 눈이 먼 테레이시우스는

눈을 감은 채로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는 항상 나는 오이디푸스다. 내 눈을 찌르고 싶어질 때에야

한 때는 빠졌던 남자가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이렇게 내 20대가 혼란스러

웠고 그렇게 취업이 안됐나, 하는 답은 문득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다가 10년은 더 흐른 후에

알게 되기도 한다. 나중에 뭐하고 싶냐는 질문에 자꾸 난 아주 나중에 글을 쓸 거라고 했다.

왜 그 대답을 하면서 억지로 면접을 보고 다녔을까. 그냥 그대로 모니터 앞에 앉을 걸.


하지만 그 미로같은 시간들도 오이디푸스가 운명을 피하려 도망쳐나온 것과 같이

 아이러니하게도

필요한 시간들이었으리라, 라고 절취선을 그어야 회한으로 허망한 시간을 보내지 않으리라.


그래도 그는 놀라운인물이었다. 자신이 운명을 피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두 눈을 뜨고

진실을 보지 못했던 눈을 찌르고 광야로 떠도는 벌을 받는 것을 선택했기에.

진실을 보려하지 않고 어딘가에 숨어 버리고, 거짓말하고 거짓말을 계속하며 이를 진실이라고

우기는 가끔 뉴스에 보이는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기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강력한 등장인물이

될 수가 없다.




이전 18화 5/100 등장인물과 함께 하는 여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