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작은 행동들, 미세하게

우울의 늪에서

by moonbow


일단 우울증과 우울감은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주로 우울증 혹은 조울증 환자가 아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운동해

햇빛 받아

바쁘게 살아

걸어

청소해

여행가

책 읽어

술 먹어

마음먹기 달렸어, 명상해


등등은 증상이 심한 상태에서는 할 수도 없고 오히려 몸살감기를 심하게 앓아 체온이 38도가 되어가는 사람한테 웃어, 웃어야 좋은 일이 생겨,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쓸모없음은 물론 폭력에 가깝다. 물론 저런 일련의 행위들은 어느 정도 치료를 하고 체력을 회복한 후 라면 일반인에게도 때때로 도움이 되는 행동들일 것이다.


하.지.만. 저런 목록은 참으로 매력적이지 않다.



실제로 이틀 동안 내리 잔 후에 내 정수리 냄새에 못 이겨 샤워를 하고 대충 침대를 정리하고 난 후에야 밥을 먹고 남들에겐 별 것 아닌 장보기를 온 힘을 다해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니 작은 고비를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틀 동안 잔 것에 대해 죄책감이나 내 자신에 대한 보복 없이 매우 느리게 때로는 가야할 수업조차 가지 않고 누군가 날 비난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어’라고 자기 보호 혹은 변명할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집안일이나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으면 가슴 속에 깊은 상처도 잠시 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했던 일은


누워서 천장 보면서 멍 때리기

귀여운 동물 사진 찾아보기

아주 천천히 걷기 가다가 힘들면 벤치에 앉아 쉴 것

요리하는 영상 보기, 우연히 힘이 나면 응용해서 해보기

책상 정리를 시도해보기, 그러다 정리보다는 꽂히는 책이나 노트 보기

맛있는 차를 마시기

별로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영화를 보기

엎드려서 송장자세를 취한 후 나보다 슬프게 우는 음악듣기

코미디 보기

고양이 얼굴 쳐다보기

고양이 털 빗기기

철저히 혼자가 되기

카페에 가서 커피나 차만 마시고 가만히 있기


아직은 이렇게 해도 된다, 달래면서 나를 쉬도록 해준다. 가끔은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었다. 이유 없이 어쩔 수 없이 마시는(회의나 약속이 아닌) 커피 한 잔은 그만큼의 가치를 해야 한다고 나에게 충고한다.

그만큼 작업을 하면서 마셔야 돼. 그러지 않으면 차라리 마시지마. 이건 재정적인 문제도 있으니 아주 가끔 해도 될 일인데도 죄책감 없이 하지 못했으니 차차 하면 된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못 그리지만 그림을 그리기

하늘 사진 찍기

안 입는 옷을 리폼해보기 (실패가 더 많고 청바지를 청치마로 만드는 데만 일 년이 걸리기도 하지만)

내 입맛대로 요리하기

\

아주 힘들 때.


샤워하기

옷 갈아입기

밥 먹기


이 세 가지만 해도 당신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밥을 먹고 아주 큰 용기나 힘을 낼 수 있다면


설거지하기

세탁기 돌리기

바닥 청소


이 중 두 가지를 한다면 올림픽 메달감이다.


대충 이불정리

바닥 청소

책상에 공간 만들기


조금씩 기운을 차린다면 아주 지극히 일상적인 일을 대충 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일이라고 하면 조금은 평화롭고 습관적으로 하는 일인데 나란 사람은 뭔가 시간을 정해서 하고 습관을 만드는 것에 부적합한 인간으로 설정된 탓인지 내키는 대로 하는 편이다.


이런 일을 하면 사실 매우 종종 발생되는 집안일 폭탄에 살림이란 무의미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일어나서 밥 제 때 챙겨먹는 것이 전쟁이나 다름없다는 말에 백퍼센트 동의하지 못했는데 맞다. 전쟁이다. 그 말은 그만큼 힘들다는 말. 또 동시에 목숨걸고 해야 한다는 말.


이것조차 너무 힘들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 없다. 눕자. 전투적으로 자자.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견디기 위해 또 생각하기 위해 또 감정을 느끼면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끌어다 썼는가.


쉴 이유가 많다. 쉽시다. 그리고 죄책감은 느끼지 말기로. 아픈데 환자가 누워있다고 욕먹는 거 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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