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여행을 갔을 때였다.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와 TV를 켜기 위해 리모컨을 들었는데 버튼이 스무 개도 넘어 난감했다.
TV 전원, 셋톱박스 전원, 통합 전원, 홈버튼, 음성검색 …
문의를 받은 객실 직원은 답했다.
'다 필요 없고, 맨 위에 가장 큰 빨간색 버튼만 누르고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실제로 TV는 그 한 개의 버튼만으로 충분히 작동했다. 그리고 음량과 채널 위아래 버튼은 알아서 사용할 뿐, 복잡한 설명이 더는 필요 없었다.
기능이 단순해도 처음 마주하면 사람은 잠깐 머뭇거리게 된다. 그 멈춤을 줄여주는 건 설명이 아닌 예상 가능한 사용 흐름일 게다.
잘 설계된 리모컨은 설명서를 읽지 않아도 쓸 수 있다. 이는 처음 접하는 앱에 튜토리얼(사용자 가이드) 없이도 앱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튜토리얼 없이도 자연스럽게 흐름이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내가 기획 중인 앱은 남미에 있는 작은 나라의 현지 대학생들을 위한 디지털 학생증 앱이다.
기능은 단순하다.
Open DID 기술은 알아서 돌아갈 뿐, 디지털 학생증을 발급받아 수업 일정이나 도서 대출 현황을 조회하거나 성적증명서 등을 발급받을 수 있는 정도이다.
내 기획안을 보고 개발자는 말했다.
“튜토리얼까지는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업데이트를 자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때마다 튜토리얼까지 다 바꾸긴 부담돼요.”
맞는 말이었다.
튜토리얼은 만들기도 어렵지만 유지하는 건 더 어렵다. 아니, 솔직히 어렵다기보다는 귀찮다.
게다가 단순한 앱일수록 '그냥 써보면 알 텐데' 같은 기대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제일 처음 만나는 사용자의 망설임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모국어(스페인어)도 아닌 영어로 앱을 만들어야 하다 보니 단순하다는 이유로 아무 설명도 없다면 사용자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이게 무슨 기능이 있는지도 모르고 학교에서 사용하라고 하니 그저 강제로 다운로드하여야 하는 단순 앱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이다.
단순함은 정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의도를 잘 정리해 보여줘야 유지될 수 있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결국 나는 조금 고집을 부려 처음 설치 할 때 잠깐 보이도록 튜토리얼을 넣기로 했다.
설명이 아니라 흐름을 위한 설계로.
대신 skip 버튼은 계속 띄워놓을게요 :)
좋은 UX는 업데이트가 자주 일어나도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에서 출발한다.
그 구조는 반드시 복잡할 필요는 없다.
단지 사용자의 시선과 손가락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한 번 더 생각하고, 불필요한 정보를 덜어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튜토리얼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사실 튜토리얼 없이도 사용자가 스스로 기능을 파악할 수 있게 흐름을 먼저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 필요한 순간에만
아주 짧은 안내로 사용자 불안을 잠시 눌러줄 수 있는 설계가 지속 가능한 UX를 만든다.
튜토리얼은 결국 사용자와 나누는 첫 대화다.
그 대화가 설명이 아닌 구조로 이뤄질 수 있다면
업데이트가 아무리 잦아도 앱은 익숙한 감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좋은 서비스는 매뉴얼 없이도 길을 잃지 않는다.
업데이트는 자주 바뀌어도 사용자의 감각은 매번 같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