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나 하나 희생하면 인생 그런대로 흘러가겠다 싶었는데.
_박동훈
희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가 6.25 용사냐 인마? 희생하게.
열심히 산 건 같은데 이뤄놓은 건 없고, 행복하지도 않고.
희생했다 치고 싶겠지.
그렇게 포장하고 싶겠지.
지석이한테 말해봐라. 널 위해서 희생했다고.
욕 나오지.
기분 드럽지.
누가 희생을 원해.
어떤 자식이, 어떤 부모가.
아니, 누가 누구한테.
그지 같은 인생들의 자기 합리화.
쩐다, 인마.
_겸덕
다들 그렇게 살아.
_박동훈
아이구, 그럼 지석이도 그렇게 살라 그래.
그 소리엔 눈에 불나지?
지석이한텐 절대 강요하지 않을 인생, 너한텐 왜 강요하냐?
너부터 행복해라 제발.
희생이라는 단어는 집어치우고.
상훈이형하고 기훈이, 별 사고를 다 쳐도, 어머니 그 두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것 못 봤다.
그놈의 시키들 어쩌구 저쩌구 매일 욕하셔도 마음 아파하시는 거 못 봤어.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는 너 때문에 매일 마음 졸이시지.
상훈이 형이나 기훈이는 뭐,
뭐 어떻게 망가져도 눈치 없이 뻔뻔하게 잘 살 거 아시니까.
뻔뻔하게 너만 생각해.
그래도 돼.
_겸덕
너를 위해 내가~
이 말을 들으면 부글부글 짜증이 올라옵니다.
이 말은 "너 때문에 내가~"로 들리기도 합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해놓고는 나를 위해서라니. 나 때문이라니.
정작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정말 나를 위해서였다면 생색을 내지를 말던가, 아니면 '너 좋아하는 거 보는 게 내가 좋아서'의 마음이던가.
인간은 자신을 위해 움직입니다.
이타적으로 보이는 사람조차도 그것이 자신에게 감정적으로 기쁨이거나 정신적으로 충만함과 만족을 주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합니다.
누군가를 돕고 있을 때, '돕는 나'를 좋아하거나 '도움이 된 너의 상태'를 내가 원하기 때문입니다.
너를 위해, 우리를 위해, 사회를 위해라는 말이 당장은 동기부여가 되고 어깨가 으쓱할지는 모르지만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맹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책임전가도 할 수 있게 됩니다.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래?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
현실에서 또는 드라마에서 많이 나오는 대사입니다.
열심을 다한 누군가의 대사입니다.
억울하고 배신감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위하는 행동'에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바라는 것 자체가 나쁘지 않습니다.
합의하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한 것을 상대에게 책임 전가하는 것이 나쁩니다.
사랑하는 이의 날개가 되고 싶지 짐이 되고 싶은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상대방이 스스로를 날개로 느끼게 하고 싶은가요? 짐으로 느끼게 하고 싶은가요?
바라는 반응이 있다면 요청할 수 있습니다.
상대는 수용하거나 거절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거절하면 나는 계속할지 그만둘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를 책임집니다.
그러니 정말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라면,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네가 기쁘면 나는 더 행복해."이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내가 원해.
그래서 나는 한다.
그러면 더 이상 원하지 않을 때는 그만둘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계속한다면 원하기 때문에 또는 선택했기 때문이기를 바랍니다.
싫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끌려가는 심정으로 무엇을 하고 있다면 '그것을 하지 않을 때의 결과를 감수하지 않기 위해 나는 지금 이것을 하는 선택을 한다'이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것과 타인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내 인생을 살면서 책임은 타인에게 묻는 것은 이상합니다.
물론 시스템 적으로 또는 폭력에 의해 무력에 의해 강제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있느냐의 차원을 말하고 싶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조차도 자식이 잘 먹고 잘 입는 것을 보는 것이 스스로 기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일반적인 보통의 자식은 부모님의 삶을 담보로 나만 잘 먹고 잘 입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로 인해 부모님의 평생이 잿빛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행복할 자식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자식을 위해서도 부모님을 위해서도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내가 선택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이 변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라는 자각이 있다면 더 행복하고 조금 덜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동훈은 좋은 사람이 맞습니다.
많이 좋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 맞지만 그가 사랑하는 사람 어느 누구도 그가 그런 삶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토록 애달파하는 어머니는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어 보이는 그 때문에 매일 마음 졸입니다.
그의 아내는 혼자 모든 짐을 다 짊어지고 앞만 보고 걷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외롭습니다.
그의 아들이 어느 날엔가 아버지의 삶이 자신을 위한 희생으로만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감사로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그러니,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박동훈도 당신도.
그리고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