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순이와 눈꽃돌이

짧은 이야기

by 윤다서영

산책 초입 길,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새싹들을 보며 봄이 향기에 흠뻑 취해 있는데, 뜬금없이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새싹들 사이로 흩날리는 눈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열까, 말까? 순이는 문고리를 잡고서 한참을 망설였다.

"순이야, 어서 열어봐."

순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훽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가 먼저 열어봐."

"네가 제일 언니잖아."

쳇, 이럴 때만 언니지. 순이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포근한 햇살이 순이에게 용기를 심어 주었다.

"그래. 결심했어. 열어볼게!"

순이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와아!"

순이는 눈부신 햇살에 눈가를 찌푸렸지만, 곧바로 펼쳐진 멋들어진 세상에 환호성을 질렀다.

"순이야? 어때?", "여니까 어때?", "우리도 열어도 돼?"

사방팔방에서 순이를 향한 질문이 쏟아졌다. 정신없이 세상을 바라보던 순이는 자매들의 질문에 답을 할 여유가 없었다. 순이는 멋들어진 세상을 더 보기 위해 문고리를 세차게 잡아당겼다. 아니, 당기려고 했다.

"어? 왜 벌써 나와?"

누군가의 목소리에 순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순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어린 소년이 순이를 향해 방긋 웃고 있었다. 순이는 발그레진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말을 버벅대며, 물었다.

"너, 누.. 누구야? 여기는 네가 올라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새하얀 소년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내 이름은 돌이. 나는 올라온 게 아니고 내려왔는데."

돌이는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돌이의 손가락을 쫓아 올려다보던 순이가 화들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하늘 위에는 돌이와 같은 새하얀 꽃잎들이 사방팔방 날아다니고 있었다.

돌이는 순이를 향해 다시 물었다.

"왜 벌써 나온 거야?"

순이는 돌이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고개만 갸웃하는 순이를 본 돌이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순이 곁으로 날아올랐다. 문고리를 잡은 순이의 손이 흠칫 떨렸다. 그 모습에 돌이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직 문을 다 열면 안 돼."

"왜 안 되는데?"

"배우지 않았어?"

"뭘?"

"너는 우리랑 만나면 안 된다고 배웠을 텐데."

"왜 만나면 안 되는데?"

순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돌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 문고리를 잡은 순이의 손에 자신의 손을 슬며시 가져다 대었다.

돌이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순이가 포개진 손등에 새빨개진 얼굴로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앗, 차가워."라며 외쳤다. 돌이는 재빠르게 순이에게서 멀어지며, 말했다.

"이래서 안 된다는 거야. 분명히 배웠을 텐데, 너 공부 못했지?"

순이는 뻘게진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돌이를 째려보았다. 돌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싱글거렸다.

"배웠어. 이제 기억나."

순이는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기억을 강제로 끌어올렸다.

'새하얀 눈꽃이 사라지는 날이. 우리가 밖으로 나가는 날이란다.'

햇살이 따스한 날, 그냥 나가면 되는 거지, 눈꽃이 뭔지, 사라지는 날이 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순이는 수업에 집중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이 사라지는 날이 우리가 나가는 날이니까, 평생 못 볼 존재들인데.

평생 못 볼 존재들? 순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이를 쳐다보았다.

"이제야 우리가 누군지 알아챘나 봐."

순이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나 죽는 거야?"

"뭐?"

돌이는 하하하 숨이 넘어갈 듯이 웃기 시작했다. 눈물까지 훔치며 한참을 웃던 돌이는 "너 진짜 공부 못했구나."라며 또다시 순이를 약 올렸다. 하지만, 순이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따스한 햇살만 믿고 나왔는데, 보면 안 되는 존재들을 보다니. 이제 막 세상에 나왔는데, 멋들어진 세상에 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순이는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순이의 불안이 느껴졌는지, 웃음을 멈춘 돌이가 목을 가다듬고는 순이를 향해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순이."

"순이야 걱정 마. 원래는 너희가 나오는 날이 맞아. 우리가 갑자기 나타난 거야. 마지막 비행이라고나 할까?"

"마지막 비행?"

"응. 우리는 한동안 날아다니지 못할 테니까. 어쩌다 타이밍이 맞아서 내려왔는데, 운이 좋게도 너를 만났네."

순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를 만난 게 운이 좋은 거야?"

"그럼. 너 역시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는데."

돌이는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돌이의 미소에 순이의 숨이 순간 멈췄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상에 나와서 본 것들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제 가봐야겠다."

점점 사라지는 눈꽃들을 보며 돌이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간다고? 어디로?"

"우리가 가야지 너희가 나오지."

"같이 있으면 안 돼? 네가 보고 싶을 거 같은데. 가지 말고 있으면 안 돼?"

"역시 너는 공부를 못했어."

한번 더 순이를 놀린 돌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원래는 만날 수 없는 인연이지만, 만났잖아. 그러니까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음, 네가 들어가는 날 올 수도 있을 거고. 우리가 인연이라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멀어져 가는 돌이를 향해 순이가 힘차게 외쳤다.

"꼭 다시 와야 해. 나는 네가 올 때까지 들어가지 않고 기다릴 거니까. 꼭 다시 와야 해."

흐릿한 미소로 순이를 쳐다본 돌이는 마지막 비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순이는 문고리를 활짝 열고 눈꽃처럼 새하얀 꽃망울을 누구보다 어여쁘게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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