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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R POST Jul 09. 2018

윈드리버 - 경계의 불안

윈드리버 (스포 포함) 


경계는 늘 불안하다. 두 개의 정체성이 만나는 접점이다. 경계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기란 쉽지 않다. 약탈자가 있으며 피해자가 있다. 


미국 동북부 윈드리버, 인디언 보호구역이다. 변덕스러운 날씨, 추운 기온,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눈, 척박한 땅 윈드리버... 


이곳에 한 인디언 소녀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영화는 인디언 소녀의 절규로 시작한다. 영하의 날씨에 맨발로 그녀는 어딘가를 향해서 뛴다. 그리고 달빛은 매우 싸늘하게 그녀를 비추고 있다. 


폭력 


인간의 폭력성은 어디서 기인할까? 사실 한 개인이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보다 어떤 집단이 광기 어린 생각으로 뭉쳐서 폭력을 행할 때 그 폭력은 더욱 잔인해진다. 개인이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폭력에 대한 죄책감이 경감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지는 않는가? 특히 그 피해자를 어떤 프레임 속에 가두고 그들의 존엄함을 무참히 짚 밟고 있지는 않는가? 어떤 당위성이 개인의 양심마저 합리화하여 폭력의 잔혹함마저 보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는지... 


경계의 선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폭력의 잔혹함을 스스로 합리화한다. 침묵의 카르텔처럼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들이대며 사람은 위선적으로 변해 간다. 


영화 윈드리버는 경계선에 있는 인간의 잔혹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폭력에 집중하기보다는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상처를 치유하는 회복의 관점으로 시선을 쫓고 있다. 


결국 또 다른 유형의 복수라는 폭력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지만, 그 폭력이 잔인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분노의 삭힘 속에 드러난 슬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폭력은 슬픔과 맞닿아 있고, 그 슬픔의 바닥에는 상실의 아픔이 있다. 뭔가 거대한 담론을 통해 세상의 정의를 외치는 이들의 민낯은 역겹기까지 하고, 매우 본능에 가까운 비인간적 태도일 뿐이라는 냉소가 하얀 설경과 함께 그려진다. 


그들을 보호 하지만, 보호하지 않는 통제 구역, 통제 구역 뒤에 숨은 위선자들. 그리고 가해자 피해자. 윈드리버는 대 자연의 침묵 속에 점차 잔인해져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심도 있게 그리고 있다. 


한 없이 내리는 하얀 눈 속에서 그들의 슬픔까지도 하해질 수 있다면, 경계의 폭력은 점차 치유가 될까...? 


윈드리버 가슴이 먹먹해지는 영화다. 


H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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