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우리 딸. 오늘부터 아빠와 함께 그림책을 읽자. 아빠가 먼저 읽고 하은이에게 들려줄게
마음을 키우다. 마음이란 무엇일까? 왜 아이는 마음을 키워야 하는 걸까? 마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아이들의 마음에 내가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오랜 고민 속에서 '다섯콩 출판사'에서 출간한 "마음 콩 쑥쑥' 인성동화 그림책을 구매하였다. 사랑하는 딸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데, 나는 아이와의 상호 작용이 매우 서툴고 가끔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울 때가 있다.
어른이 되어 보니, 어린 시절 영어 단어 하나를 외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마음을 키우는 것임을 느낀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마음 키우는 법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물론 그 시절 부모들은 대부분 우리 아버지 같은 분들이었으니 현재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단지, 나는 딸의 성장 과정에서 이전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싶다. 아이 성장을 위한 것도 있지만, 사실 내가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아기와 함께 있으면 너무 행복하다.
아이와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까? 가만히 앉아 아이가 노는 것을 방치(?) 하는 것만이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무언가를 계속 읽어 주는 것이 아이와 함께 하는 것일까? 그것도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오랜 생각 끝에, 아이와 함께 하는 방법을 찾다가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 것은 어떤지 생각해 본다. 그림책을 읽는다는 것이 꼭 '내가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는 행동'은 아닌 것 같다. 나부터 그림책을 이해하고 아이와 상호 작용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충분히 내가 그림책의 내용처럼 아이에게 행동할 때 아이가 그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내가 그림책처럼 행동하지도 않는데, 아이에게 "너는 이렇게 해!"."자존감을 가져!"."남을 배려해"."용기를 내!" 명령 같은 문장으로 강요(?) 할 수 있을까? 아빠인 내가 먼저 그림책을 읽어야겠다. 그리고 딸에게 읽어 줘야겠다.
아이의 자존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재능으로 아이의 자존감이 형성되지 않는다. 자존감은 아이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만들어 가는 마음이다.
"내가 할래요" 그림책은 '자존감'을 특별한 문구로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단지 일상적인 아이의 생활을 그리며 아이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보여 준다. 그런데 그림책을 읽으며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그동안 아이에게 가끔 잘못된 행동을 했구나'. 아기가 밥 먹기 싫어 투정을 부릴 때, 옷을 입기 싫어 투정을 부릴 때, 나는 밥을 먹이겠다는 목표와 옷을 입혀야 한다는 목표 아래, 아이의 본질적인 자존감에 대해서는 존중하지 않고 짜증을 내지는 않았는지...
어떤 목표를 실행하기 위해 아이를 위한 다는 목표로 아이에게 짜증을 낸 것이다. 갈등은 있을 수 있고 아이가 짜증을 낼 수 있다. 문제는 내가 짜증을 낸 사실이었다. 아이는 단순히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것인데, 나는 '너 그렇게 하면 안 돼!','아빠가 널 위해 밥을 먹이는 거야!','좀 가만히 좀 있어!'.'혼자 하지도 못하면서!' 하며 나 스스로 짜증을 낸 것이다. 참 후회된다.
일상에 존재하는 아이의 자존감을 어떻게 인지할 수 있을까? 아이는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를 아이의 자존감 입장에서 바라보지 못했다. 아이의 의도가 있는데,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아이에게 짜증을 나를 발견한다. 아이의 자존감은 거기서 낮아지는 것은 아닐까... 미안했다.
혼자 밥을 먹기 위해 수저를 드는 행위, 혼자 신발을 신기 위해 버스 시간 늦었어도 신발 끈을 매는 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행위, 기저귀를 갈아 치울 때 우는 행위, 이 모든 행동에 성장이라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나는 아이의 행동을 아이의 입장에서 기다려 줬을까?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나의 힘을 쉽게 쓰지는 않았을까? 아이가 읽는 그림책이지만 그 내용을 먼저 읽으며 매우 부끄러운 나(아빠)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
아이는 일상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시도한다. 너무 미약한 행동이고, 실수투성이인 행동이다. 그런데 아빠인 난 그 행동을 잘못된(?) 행동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나의 짜증이 표현될 때 딸의 자존감은 낮아질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비록 아이의 행동이 매우 미약하고 원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이를 기다리며 너도 '할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나는 딸에게 계속 나의 기준에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있는데, 기다림보다는 쉬운 힘을 먼저 선택한다. 싫다고 던지는 밥그릇 뒤편에는 본인 혼자 수저를 들고 싶은 욕구가 있었고, 자신이 배가 고플 때 먹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을 잘 못하기에 그림책을 읽으며 앞으로 아이를 기다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다리지 못하는 나의 성급함이 아이의 적극성을 소극적으로 바꾸지는 않을까? 아이는 자기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일을 스스로 도전해 본다. 이 도전이 꼭 결과로 이뤄지지 않더라도 도전하는 그 자체가 아이 삶의 큰 원동력이 될 것인데... 아빠인 난 그걸 잘 몰랐다.
아빠인 나는 딸을 기다려야 한다. 나의 기다림의 정비례만큼 아이의 자존감이 높아질 것 같다. 성급한 나의 반응이 딸을 당황하게 하고 아이의 자존감을 낮출 것이다.
언젠가 우리 딸도 성장하여 아빠를 떠날 날이 올 것 같다. 그때가 되면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 것 같다. 그때 하은이는 어떤 아이로 성장하고 있을까? 세상의 모든 호기심에 지금처럼 손을 뻗어야 하는데, 지난날, 아빠의 다그침에 손을 뻗지 않는다면 어떡할까... 갑자기 두려워졌다. 아이가 나를 떠나 사회로 나갈 때 아이는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은 자존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자존감을 바탕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만약 자존감이 낮으면 아이의 사회성도 매우 낮을 것이고, 위축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아이의 자존감은 지금부터 성장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어른이 된 나도 매일 하는 질문이다. 하물며 이제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은 앞으로 얼마나 많이 생각할까? '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은 자존감을 기반으로 세워지는 성장의 단계라고 생각된다. 거울 속에 다양한 자기 모습을 생각하며 그 모든 다양한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본질적인 자존감이 높았을 때 가능한 이야기 일 것 같다. 자존감이 있다면 아이는 행복할 것이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자존감은 건강한 자아의 기초이다.
즐거운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딸. 아이에게 마음을 가르쳐 줄 수 없다. 그저 아이의 마음이 자랄 수 있도록 기다려줘야 할 것 같다. "내가 할래요"를 읽으며 "응 그래 네가 하렴, 아빠가 뒤에서 기다릴게,"하고 아이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 그러면 우리 딸이 더 행복한 삶을 살지 않을까... 아이의 마음이 자라지 않을까.
이제 딸아이에게 "내가 할래요"를 읽어 주러 간다. 그리고 책의 내용처럼 일상의 자존감을 키울 수 있도록 아빠로서 딸에게 많이 노력해야겠다. 그건 아빠인 나를 먼저 바꾸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사랑한다. 딸아.
마음콩 쑥쑥 "내가 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