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을 해 본다. 아이가 생각하는 아빠의 모습은 어떨까? 물론 그림책에 나와 있는 아빠처럼 매일 누워서 텔레비전 보고, 집안일을 안 하지는 않는다. 그림책은 주제를 말하기 위해서 앞 부분에 전형적인 한국 남자(?)들의 모습을 그린 것 같은데... 사실 그림책 앞부분의 현실이 아쉽기는 하다. 저런 모습들이 전형적인(?) 한국 남자의 모습이라는 게... 쩝...
우리 딸 하은이에게 아빠는 어떻게 그려질까? 엄청 큰 키에 몸짓도 있으니, 커 보이기는 할 거다. 자기보다 몇 배로 큰 신체를 가지고 있으니 우러러보면 거인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인 모습이 신뢰감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가 나를 신뢰한다는 것. 그것은 뭔가 다른 요건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지지한다. '지지한다'라는 말이 무엇일까? 잘못된 행동과 위험한 행동까지 모두 아이를 지지할 수는 없다. 아이에게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는 아이가 무엇을 할 때, 잡아주고, 안아주고, 치워주고, 막아주고, 안내해 줘야 한다. 아이가 행동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줘야 한다.
사실 아빠인 내가 얼마큼 아이에게 공간을 내어주느냐에 따라 아이가 나를 신뢰할 수 있다. 신뢰는 공간 안에서 아이가 스스로 생각할 때 시작된다. 즉 신뢰는 주체자인 내가 무엇을 하고, 그것이 잘 안되거나, 위협을 당할 때, 누군가 나를 돕고 지원해준다는 아이를 위한 지지이다. 신뢰는 아이의 행동 범위가 충분히 보장될 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아빠인 나는 아이에게 어떤 공간을 제공하고 있을까? 단순히 돈을 갖다 주는 것이 공간을 만들지 못한다. 아빠가 아이와 함께 할 때, 아이에게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아이에게 아빠의 공간을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신뢰가 된다. 그래서 아빠는 적극적으로 아이의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
어릴 적 아이를 가능한 많이 안아주려고 한다. 사실 아빠, 엄마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사이즈도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어느덧 성장하면 아이를 안는 것 자체가 부모에게도 엄마에게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를 안아주는 행동은 아이가 어릴 적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포근함이 된다.
신뢰와 안정은 미리 예측 가능할 수 있는 확실성에 있다. 만약 무엇인가가 불안정하다면 그건 거꾸로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필요한 예측은 무엇인가... 그건 '엄마 아빠는 날 사랑해'라는 '신뢰'다.
사랑은 불확실성에 대한 신뢰다.
아이의 모든 미래는 불확실하다. 어느 아이가 미래를 알고 있을까? 아이 스스로 미래를 생각할수 있을까? 어쩌면 부모가 아이보다 아이들의 미래를 더욱 걱정하고 염려한다. 정작 행동하는 본인 당사자는 호기심에 이끌려 세상을 알아가고 있을 뿐인데 부모인 나는 호들갑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이를 안아주며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아이의 미래의 불확실성을 다그치고 있는지... 나부터 아이를 신뢰하지 않고, 아이에게 공간을 주지도 못하면, 아이도 나를 신뢰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신뢰는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믿음이다.
나는 아이가 무엇을 할지 모른다. 단 아이가 무엇을 하도록 공간은 만들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공간은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의 시선에서 지원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사랑은 아이를 객체로 볼 수 있는 시선을 길러줄 것이고, 그 사랑을 통해 아이를 신뢰하고 지지하는 내가 만들어 지지 않을까.
아이가 나를 신뢰하는 것. 그것은 내가 아이를 신뢰할 때 생기는 공간이다.
그림책을 보고 활동 놀이를 해 본다. 아이가 퍼즐을 맞추며 가족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 가족들이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다. 아이는 퍼즐을 맞추며 사랑하는 우리 가족이라는 마음을 갖는다. 그러면 아이의 마음에 신뢰라는 마음콩이 쑥쑥 자란다. 무럭무럭 자라렴. 아빠는 하은이를 신뢰하고 사랑한단다. 하은이도 아빠를 신뢰하고 사랑해 주렴. 고마워,
마음콩 쑥쑥 '수퍼맨 우리 아빠’ - 신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