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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R POST Dec 30. 2018

농부와 감기약, 마음콩 쑥쑥, 인정



감기


일주일 간 감기에 걸려 힘이 없었다. 특별한 주간이라 새벽 6시에 출근을 했고, 추운 날씨 때문에 감기에 걸려 저녁에는 일찍 잤다. 하루 종일 해롱해롱 거리며 살고 있으니, 이거는 뭐 사는 건지, 살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병원을 가고 약을 먹으니 이제는 조금 살 것 같긴 하다. 


그림책을 읽으려 제목을 보던 중, '농부와 감기약'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무슨 이야기지? 



인정? 


마음콩 쑥쑥을 읽으려 할 때면, 항상 호기심이 충만 해진다. 마치 아이가 책을 펴듯이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책 뒷장이 궁금해진다. 


내용은 이외로 단순했다. 

농부는 채소를 짓고 

요리사는 그 채소를 사고 음식을 만든다. 


그 음식은 디자이너가 맛있게 먹고, 

디자이너는 옷을 만든다. 


이렇게 쭉 이어가다 보면, 

과학자를 만나고, 그 과학자는 약을 만든다. 


농부가 감기에 걸려 약국에 오고, 

약사는 농부에게 과학자가 만든 약을 건넨다. 


모든 것은 이어져 있다는 이야기다. 



책을 덮고 한참을 묵상(?) 한다. 


'참 많은 철학이 담긴 책이구나'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직업?


직업에 귀천은 없다. 문제는 직업을 향한 편견이 존재한다. 물론 경험에서 나온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산업이 발달하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부자를 싫어하고 기득권을 싫어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부자가 아닌 사람들을 경멸하고, 약자를 업신여긴다



계급을 나누며 편을 가르고, 

자기 보다 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비난하면서도, 

자기 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참 업신여긴다. 



왜 일까? 


사회를 비판하지만, 

사회 속에서 가질 필요도 없는 위아래를 정한다. 


그 가운데 있는 것이 직업이다. 


흔히 사람들은 "그 사람 뭐 해?"라고 묻고 


'응 농부야, 응 과학자야, 응 의사야, 응 약사야, 응 요리사야.'라고 답하면 그 사람의 정체성을 정해 버린다. 

물론 직업이 어느 정도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어떤 성향을 추측할 단서일 뿐이지, 

그 사람의 높고 낮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세상에 대한 비판 이면에 

높고 낮음을 정하고 경계하는 것일까? 



노가다.


일본어다. 목수를 하찮게 여기며 부르는 단어로 사용된다. 흔히 '막 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막 노동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집을 짓는 일에는 다양한 분야가 있다. 

형틀 목수가 있으며, 철근 배합 전문가가 있고, 인테리어 목수가 있다. 

미장이나 조적, 전기 배선에도 다양한 전문가가 존재한다.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리하는 사람이 흔히 말하는 현장 소장님이고, 

이 현장 소장은 집이라는 거대한 자본이 들어가는 일에 총책임자 역할을 맡는다. 

웬만한 사업보다 더 많은 비용이 지출되고 책임이 큰 직업이다. 


그런데... 이게 '막일'인가? 


도면을 볼 줄 알아야 하고, 제작을 실제로 해야 한다. 

콘크리트 배합도 체크할 줄 알아야 하고, 

작업의 순서도 잘 감리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집 짓는 것은 매우 전문적인 영역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직업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직업의 귀천을 정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남들이 그렇게 말하니까요."라며 모호한 답변을 한다. 



즉 "잘 모른다." 



그러니 각자의 직업을 인정하지 않고 

직업의 높고 낮음을 평가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의사는 돈을 더 벌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직업의 가치를 측정하지 않나요?"


그것도 모르는 소리다. 



의사보다, 목수가 돈을 적게 벌까? 

의사보다 약사가 돈을 적게 벌까? 

의사보다 농부가 돈을 적게 벌까? 


농부만 보자. 물론 많은 농부들이 의사보다 많이 벌지 못한다. 


하지만, 현재 농촌을 가보면, 그게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실제로 가보자. 



요즘 농사는 대농을 한다. 소작농은 없다. 

대부분 콤바인을 이용한 기계 농법이고, 

농약도 이제는 드론으로 뿌린다고 한다. 


특용 작물을 재배하는 사람들은 일 년 수입이 억 단위인 사람들도 있다. 

양식장에 고기를 키우는 사람들은 엄청난 부자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성공한 농부와 어부이다. 



그러면, 실패한 농부와 어부는 돈을 적게 버는 것일까? 


적게 버는 농부는 농번기에는 일하지만, 

농번기가 아닌 기간에는 쉰다. 물론 조그마한 소일거리는 하지만, 대부분 쉰다. 


의사는 365일일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누가 더 나은가? 


그렇다고 의사가 안 좋은 직업이냐? 

그것도 아니다. 



의사만큼 존경받는(?) (가끔은 아니지만) 직업도 없고 

돈을 많이 버는 직업도 드물다. 



결국 돈의 문제가 직업의 높고 낮음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직업의 높고 낮음은 처음부터 없었고 

현재는 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내 생각이다. 



나 또한 현재는 아버지와 함께 가설재(건축 자재 비계, 거푸집 제공) 사업을 하고 있지만, 

이 사업 외에도 서점을 하기도 하고, 가끔 영상을 찍거나 글을 쓰며 다른 일들을 한다. 



물론 다 각자 명함이 있다. 

직업은 내가 하기 나름인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직업이 아니다. 



인정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아마도 스스로에 대한 성취감, 그리고 만족, 즐거움 때문이 아닐까? 

아버지로서 인정받고, 남편으로서 인정받고, 직장에서 인정받고, 후배에게 인정받고, 

내가 하는 일을 인정받으면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까? 



인정받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인정을 받으니, 

열심히 하는 자신의 노력 끝에 인정이라는 뿌듯함이 선물로 온다.



마르크스는 직업을 계급으로 나누었지만, 애덤 스미스는 직업을 각자의 일로 정의했다. 

난 거기에 두 철학자의 차이가 있다고 봤다. 


내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인정하지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누군가를 칭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건 역으로 나에게 결핍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칭찬할 수 있는 것은 결핍의 반대말 이다. 



내가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도 나를 존중하는 발판은 '인정'이다.  


직업을 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재능으로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을 향한 진정한 시선이다. 

거기에는 높고 낮음은 없다. 


단지 그 사람의 재능의 노력과 결과만 있을 뿐이다. 

노력이 부족하거나 결과가 미흡하면 어떤가? 


격려해주면 되고 그 재능을 칭찬해 주면 된다. 


그럼 그 재능은 그 사람의 것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다. 


인정도 마찬가지다. 


내 분야에 전문가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분야도 인정한다. 

그만큼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 다양한 것들을 적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을 떠나서 


누군가의 노력의 땀과 결실 때문이다.



또한 나의 노력과 결과도  

농부가 감기약을 얻는 것처럼 

돌고 돌아 누군가의 재능으로 다시 내게 돌아온 결과다. 


인정이란 

결국 돌고 돌아 

서로를 존중하는 

각자가 자신의 재능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는 것. 


딸의 작은 걸음마에도 

박수를 치며 인정해 주는 이유는 

아빠의 인정이 딸을 신나게 하는 인정이 때문이다.  


무언가를 인정할 때 그 사람은 그것을 더욱 잘하게 된다. 

결국 공부를 잘하는 것도 

예체능을 잘하는 것도 

그 사람을 인정 해 줄 때 

그 실력이 성장하는 것이다. 



마음콩 쑥쑥, 농부와 감기약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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