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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목 Feb 28. 2023

풀빵

우묵하게 팬 틀에 묽은 밀가루 반죽과 팥소 따위를 넣어 구운 빵

차가워진 공기, 두꺼워진 옷차림, 옷을 벗은 나무, 입김. 모두 겨울이 찾아왔음을 체감하게 해주는 것들이다. 앞의 예시들과 같이 눈과 피부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것들도 있지만, 코로 겨울이 왔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도 있다. 겨울 간식들이 풍기는 냄새가 그것이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전보다 겨울 간식을 만나기가 부쩍 어려워진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가. 길을 걷다 겨울 간식을 파는 곳을 마주하면 왠지 모르게 반갑다. 그리고 겨울마다 찾아오는 이 냄새의 유혹은 발걸음을 잡아끄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내겐 그중에서도 더 지나치기 어려운 존재가 있다. 바로 풀빵이다.


겉이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갓 나온 풀빵도 당연 좋지만, 시간이 지나 씹는 중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바삭함만 남은 풀빵도 좋다. 특유의 촉촉함과 폭신폭신한 식감이 내가 풀빵을 찾는 이유이고, 그 매력은 시간이 조금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겨울의 찬바람을 잠시 잊을 만큼의 온기만 있어도 충분하다. 풀빵만의 촉촉함이 녹아 없어질 때쯤, 팥의 달큼함이 행복감과 함께 밀려온다. 조그마한 풀빵 하나에 서사가 담겨있다.


진해 내수면환경생태공원 근처에서 사 먹은 풀빵


풀빵이 지닌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마주치기가 너무나도 힘들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겨울 간식을 마주하기가 예전보다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풀빵의 경우는 더 심하다. 그래서 풀빵과의 만남은 다른 겨울 간식들보다 각별하다. 작년 11월, 부모님과 집 근처 내수면생환경생태공원으로 산책을 갔었고, 그곳에서 실로 오랜만에 풀빵을 만났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만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풀빵 앞에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한 입 베어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예전에는 한 번도 느낀 적 없었는데, 풀빵에게서 카눌레의 느낌이 났다. 카눌레를 접한 이후에 풀빵을 먹은 적이 없어서 예전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건지. 내가 풀빵을 그 정도로 긴 기간 동안 만나지 못한 건지.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카눌레를 먹어본 이후, 카페나 빵집에서 카눌레를 보면 쉽게 지나치기 힘들었는데, 풀빵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이 은연중에 모습을 드러냈던 걸지도 모르겠다. 파리 여행 때 처음 사 먹었던 음식도 카눌레였다.


우연히 발견한 내가 좋아하는 것들 사이의 접점에 즐거워하면서, 또 한 봉지만 산 나 자신을 원망하면서, 풀빵을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대전 서대전네거리역 근처에서 사 먹은 풀빵


날씨가 좋을 때 혼자 자전거를 타거나, 월평역까지 걸어가 지하철을 타고 서대전네거리역 근처에 있는 CGV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대학을 다니는 동안 꾸준히 했던 취미 중 하나였다. 대전에서 아트하우스가 있는 CGV가 그곳밖에 없었던 것도 큰 이유였지만, 그 근처에서 사 먹을 수 있었던 풀빵도 큰 이유였다.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면, 그곳으로 가 내가 좋아하는 풀빵을 사 먹고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본 뒤, 맥주를 사 들고 돌아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서 풀빵을 볼 수 없었다. 처음에는 오늘은 쉬시는가 보다 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렸는데, 그 뒤로 그곳을 찾을 때마다 풀빵을 만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곳을 찾은 이후 꽤 시간이 흘렀다. 코로나가 찾아와 나는 집으로 내려갔고, 휴학을 하고 군대도 다녀왔다. 복학도 했지만, 그곳을 찾진 않았다.


2주 전, 집에 있던 나는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전을 찾았다. 하루는 씨네인디유에서 영화 <애프터썬>을 보기 위해 오랜만에 서대전네거리역으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오랜만에 다시 풀빵을 만났다. 이토록 반가울 수가. 예전에 풀빵을 파시던 농인 분이 같은 자리에서 풀빵을 굽고 계셨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풀빵 2천 원어치를 구매했다. 그분은 말로 감사함을 표현하는 대신, 풀빵을 하나 더 넣어주셨다. 그때도 하나씩 더 넣어주셨는데.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봉지를 열고 풀빵을 하나씩 꺼내먹으며, 예전의 기억들을 함께 곱씹었다.


먹는다는 행위는 먹는 시간을 넘어서서,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음식은 맛과 포만감뿐만 아니라, 감정과 추억까지 선물해 주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때면 배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채워진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허기진 배와 허한 마음을 동시에 달래주고 싶을 때는 새로운 식당이 아닌,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준 기억이 있는 이미 가본 식당을 찾는다. 그렇기에 좋아하는 식당이 없어졌을 때 찾아오는 상실감은 크다. 그 상실감을 맛봤던 곳에서 예전의 추억을 다시 만난 것이 너무 기뻤고, 앞으로도 그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풀빵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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