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울퉁불퉁 새벽 산책로-9월의 어느 새벽
나는 아침을 정말 싫어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새벽 서늘한 공기의 움직임들은 가장 오래되고 가슴 깊이 남은 아픈 순간의 기억을 깨우기에. 그래서인지 새벽 출근은 항상 힘들었습니다. 그 새벽 출근길이 왜 그렇게 고통스러웠는지 스스로 깨닫는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네요. 오늘은 일기장이 못쓰게 될 정도로 매번 글로 써 내려가기도 힘들었던 시간 하나를 꺼내 고통의 쓰레기통에 분리수거하려고 합니다.
열여섯 가을 어느 날.
하교 후 돌아온 집 안 공기의 흐름이 비틀려있다는 것을 사춘기의 나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어떤 감각이 움직인 걸까요. 나도 모르게 나는 가장 먼저 엄마의 옷장부터 열어보았습니다. ‘어…. 왜 아무것도 없을까?’ 누구에게도 묻지 못하고 한참을 혼자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겨우 방 두 칸, 스무 평이 채 되지 않는 집을 몇 시간 동안, 얼마나 뒤졌는지 모릅니다. 엄마의 물건 하나라도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아침에 먹던 찌개만 남아 있을 뿐 사라진 흔적은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내가 열어 놓은 서랍들은 멍청해진 나의 모습이 우스운지 입을 벌리고 놀리고 있었습니다. 그 놀림 때문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도망치듯 <자리 비움> 상태가 되어버린 엄마의 빈자리는, 나를 뜨거운 눈물의 늪에 빠트렸고, 그로 인해 몇 달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매일 아침을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아빠와 동생의 아침과 도시락을 챙기곤, 내 도시락을 챙겨 등교했습니다. 등굣길에 뿌려졌던 내 한숨과 눈물방울들은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을까요.
사실, 그렇게 나가버린 엄마보다 더 미웠던 건, 그런 상황을 만든 아빠였습니다. 아빠는 제가 가장 좋아하던 엄마를 미워하게 했으니까요. 그렇게 힘든 상황을 겪는 열여섯의 나에게 어른들은 그저 어른들의 상황을 이해하라는 말뿐이었습니다. 지금의 내 나이로도 이해되지 않는 날벼락같은 일을 사춘기의 저에게 용서가 아닌 이해를 요구하는 친가 친척들과 매일 술에 절어계시던 아빠의 모습은 아직도 눈물로 얼룩진 수채화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어요. 그래서 나이 든 딸은 여전히 아빠에게 화풀이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엄마는 일 년 뒤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집으로 돌아온 엄마였기에 더욱 충격이 컸습니다. 그 시절의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는 엄마라고 생각했었기에 ‘내가 이런 마음이 될 거라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내 인생에서 가장 예민한 사춘기 시절의 태풍 같던 일은 열일곱의 그때도, 마흔둘 인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엄마가 되어 그때를 다시 생각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나라면 집을 나가는 그런 결정을 하지 않을 것 같지만, 엄마와 같은 상황이라면 엄마 없이 지내게 될 아이들의 눈물을 볼 자신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엄마가 그때 결정했던 것처럼 저 역시 아이들에게 나의 뒷모습을 보이지 않고 돌아설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잠시나마 나보다 어렸던 엄마를 이해해 봅니다.
만약 엄마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나는 묻고 싶습니다. 엄마는 왜 돌아오고 나서도 나를, 단 한 번도 따뜻하게 안아 주지 않았던 건지. 그 궁금증 때문에 그 가을 이전의 엄마와의 좋은 기억들은 이상하게 모두 지워진 것 같습니다. 몇 달 동안 잠을 못 자서 머리가 나빠진 건 아닌지, 정말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습니다. 물론 새로운 기억도 없었습니다. 돌아온 후로 지금까지 엄마의 사랑스러운 눈빛을 받아 본 적도 없는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지금의 엄마를 한 번 더 이해해 보려 노력합니다. 지금의 나를 안쓰럽게 보는 엄마가 나도 안쓰러우니까요. 그 시절, 미워했고 지금도 미워하지만, 말하고 싶습니다. 그때라도 다시 돌아와 줘서 참 고맙습니다,라고. 그리고 더 하고 싶은 말도 있습니다. 엄마가 그랬던 던 것처럼 결혼 생활을 버티는 모습을 보여주고 사는 딸이라 미안하다고. 그래도 나름의 변명을 해 보자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만, 사실은 내가 배우지 못한 것이라고 푸념한다면, 아직 어린 걸까요. 그러니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도 어린 마음인 저는 이제 환갑을 넘긴 여전히 젊은 나의 엄마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따뜻하지 않아도 좋으니 둥글게 내 아픈 마음 한편을 만져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태 해왔던 뾰족한 사랑은 인제 그만해주었으면 해요. 저도 엄마를 그렇게 만지려 노력할 테니까요.
엄마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그림을 그려 준 사람이지만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얼마나 울었는지요- 아빠가 그렇듯, 나도 엄마 없이는 못 사는 아이이기에, 이 불완전한 미움은 오늘 새벽, 이렇게 분리수거함으로 보냅니다.
16살 겨울, 습기 찼던 내 방의 기운.
매일 내 눈물로 채웠던 그 습기, 곰팡내. 이불 냄새.
그렇게 뜬 눈으로 맞이했던 새벽의 쉰내,
옆 건물 철문을 흔들던 무거운 새벽바람.
더는 들리지 않는 아침맞이 소리
느껴지지 않는 엄마의 냄새는 나를 더 울게….
그래, 그래서 나는 아침이 싫다.
뜨는 해도 싫다.
새벽 공기 그리고 쇳소리가 나는 바람도.
지금도 그때 그 시간은 깊은 강물처럼 잔잔히 흘러
흐르는 것조차 느껴지지 않아.
왜 그렇게 담담한데, 답답한데.
시간의 강물을 거스르는 생각들은
왜 자꾸 물보라를 일으켜서 나를….
반갑지만은 않아. 넘치도록 두기엔
그 고통마저 내 것이라
쉬이 타고 넘어가지 못하는 생각의 물보라.
오늘도 이렇게 일어난 생각의 물보라는
새벽까지 나를 쉬지도 못하게 해.
결국, 아침에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나.
그래서 새벽이 싫어. 아침이 싫어.
- 2006년. 계절과 마음 모두 겨울. 나의 싸이월드 다이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