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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i Aug 21. 2019

어쩌면 우리는 운명 네 번째 이야기

우리는 부부다  #5



그와 나의 나이 차이는 한 살 차이다. 내 나이 26살, 그의 나이 27살이다. 그가 한 살 연상이지만 난 한 번도 그를 오빠라고 부른 적이 없다.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같이 일하는 동료여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게 익숙했고 외국에서 자란 그에게 오빠라는 호칭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썸을 탄 이후로는 서로에게 '그대'라고 부르며 연인 사이처럼 지내고 있다.

평일에는 퇴근 후에 만나고 주말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꼭 붙어있었다.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만나고 싶어요."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는 곧 캐나다로 갈 예정이다.

얼마 전에 관계를 정리한 전 남자 친구와도 결혼을 전제로 만났었다. 미국에서 만났고 내가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롱디(long distance)를 하게 되었었는데 자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관계였었다.

나는 남자 친구와 자주 만나고 지속적인 스킨십을 이어가야만 심리적으로 안정되는 여자다. 그런데 그와 연인이 되면 또다시 롱디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먼저 엄습해왔다.


그는 캐나다로 거주지를 옮기고 싶어 한다. 그가 태어난 한국이 아닌, 그가 자란 사이판도 아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캐나다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의 누나와 매형은 약 2년 전에 캐나다로 이민 갔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게 되면 좀 더 진지하고 성숙한 연애를 할 거고 한 사람의 마음이 먼저 변하고 헤어지지 않는 한 결혼하게 될 텐데 그럼 나도 그와 함께 캐나다로 가야 한다. 그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 같다고 말하자 그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린다.

"한.. 일주일 정도..?"

생각할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그에게 답한다.


한국에서 꽤 괜찮은 수입을 벌고 있고 설사 백수가 된다 할지언정 지원해주시는 든든한 부모님이 계신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데 쿨하게 이걸 다 포기하고 이 남자와 결혼해서 캐나다에서 바닥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며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1. 난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살고 싶어 했다.

"난 외국에서 살 거야."

꽤 오랫동안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막연하게 이야기하곤 했었다. 한국도 좋지만 남의 시선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해주는 외국이 참 좋았다.


2. 난 한국의 영어교육제도가 싫다. 영어를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는 나는 대한민국에서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의 미래는 여전히 참으로 막막해 보이고 미래의 나의 아이에게 이런 교육을 받게 하고 싶지 않다.


3. 그를 알고 지낸 세월은 꽤 되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지내다 보니 더 괜찮은 남자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 일분일초가 편하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뜨거움과 차가움의 차이가 극명한 내 유별난 성격이 이 남자와 함께 있으면 겉으로 잘 표시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내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준다는 좋은 싸인이다.

'너는 마치 들판을 거침없이 질주하는 야생마 같아.'

친한 친구 쑤는 나를 야생마 같다고 했다. 조련시키기 쉽지 않고 제대로 된 조련사를 만나야만 컨트롤이 되는 야생마, 그게 바로 나란다. 부정할 수 없다. 난 잘 컨트롤되지 않을뿐더러 누군가에게 컨트롤당하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한다. 그런 나를 조용히 조련시키는 게 크리스인 거 같다고 쑤는 진지하게 말했다.


4. 그는 진중한 남자다. 결코 경망스럽지 않으며 생각이 깊고 행동과 말에 신중함에 깃들어 있다. 나는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입을 먼저 터는 사람을 싫어하는데 그는 모든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5. 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엄청난 헌신과 사랑으로 그를 키우셨다. 자식을 향한 사랑이 좀 유별나도록 크신 반면에 자식에게 집착은 하지 않으시는 면이 꽤 맘에 든다. 그런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그에게 애정결핍의 징조나 관심종자의 스멜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6. 돈이 많지 않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하다. 돈은 많을수록 좋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돈만 많고 불성실하고 게으른 사람’은 한 트럭으로 갖다 줘도 싫다. 그는 다듬어지지 않는 원석이다. 잘 길들여지고 다듬어지면 최상급의 다이아몬드가 될 남자다.


A4 용지에 리스트를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는데 이 남자와 함께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거 같다.

내 마음을 굳히기에는 2-3일이면 충분했지만 일부러 일주일 동안 시간을 끌기로 했다. 그를 더 애태울 생각이다. 연애에도 전략이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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