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 무도회가 열렸다 9
9. 시간이 총알의 속도만큼 빨랐으면 좋겠어
그녀는 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고 나는 그녀의 명령대로 그 종이에 적힌 글을 10번 정도 머리로 읽어대고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씹어댔다. 그 종이 위에는 데이트 시간표가 적혀 있었다.
“앞으로 정확히 3주 후다. 넌 그때 몸살이라도 앓아야만 한다. 어쩔 수 없지만 그 날이 오기 3-4일 전부터 어떻게 해서든 네 몸을 아프게 만들어야 한다. 그 말 꼭 명심하고...... 그리고 이 종이. 여기에
적혀 있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거다. 명심해. 여기에 적혀 있는 대로 그대로 네 머릿속이 기억해 줘야 하고 네 몸이 그대로 따라 줘야 하는 것이니까. “
나는 내 감방 바닥에 누워 그 종이를 씹어 대면서 머릿속으로 외운 것을 다시 되뇌어 보기 시작했다.
1. 저녁 6시 10분. 선릉역 2번 출구 앞에 있는 르네상스 호텔 2층 식당으로 갈 것
2. 데이트 시간은 총 3시간. 3시간 후에는 꼭 선릉역에서 잠실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 2호선에 탈 것.
3. 무슨 일이 있어도 밤 9시까지는 병실 안으로 들어와 있을 것.
4. 다음날: 롯데월드 앞에서 조니를 기다릴 것.
5. 그 날 오후 5시 전까지는 병실 안으로 들어올 것.
6. 그리고 다음 날, 인천 공항으로 조니를 배웅할 것
7. 조니를 보낸 후 바로 병원 후문 앞에 서 있을 것 (선글라스와 모자 착용)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꼭 이 순서대로 따라 주어야 해. 첫째 날, 밤 9시쯤 간호사와 경찰이 네가 병실이 잘 있는지 확인하러 들어올 것이야. 네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나 혼자서 네 병실을 지킬 거다.
혹시라도....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지는 마. 너는 이곳에서 도망친다고 해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 네가 얌전히만 지내 준다면, 네 감옥 생활은 1년 안으로 끝날 테니까... 나도 슬슬 바깥 생활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니 나만 믿고...... 탈출할 생각은 말아줘.”
솔직히 그녀가 '탈출’이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정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을 만큼의 충격에 휩싸였다.
'탈... 출'
사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생각지도 못해본 단어였으니까...... 나는 '탈출'을 꿈꾸지 않는, 한 번도 탈출을 생각지도 못해본 나 자신이 미치도록 징그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내가 독방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독방 구석으로 식판을 직직 끌고 가서 웅크리고 등을 돌리고 앉아 수저 한가득 밥을 퍼서 입으로 가져갈 때의 그 느낌. 꼭 내가 우리 안에 갇힌 동물이라도 된 듯한 그런 느낌, 도대체 왜 아직까지 자살도 하지 않고 살고 있는 거냐는 일반인들의 손가락질을 당한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순간 나는 그런 느낌에 휩싸여 나 자신을 증오했다.
'당신......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
나는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던진 후 그냥 살짝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그녀 앞에서 잠시 나의 탈출 계획을 들키기라도 했다는 듯 표정연기를 지어볼 까도 생각했지만, 나는 역시 연기에는 너무 서툴렀다. 그리고 그 후부터 나는 탈출을 꿈꾸기보다는 시간이 빨리 없어지기만을 꿈꿨다. 시간이 총알만큼, 아니 미사일만큼 속도를 내주었으면 하고 바라었을 뿐, 내 마음속에서는 어떠한 탈출 계획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약속했던 미래 때문이 아니었다. 조니와의 데이트 때문도 아니었다. 조니와 주고받은 편지 몇 장이 내 가슴에 설렘을 만들어 줄 수 있을 정도로 내 가슴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못했다. 내가 만약 설레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뿐이었다.
'내 가슴이 설레었다면 나는 아마 탈출 계획을 세우고도 남았겠지......'
난 내 딱딱한 심장에 잠시 손을 얹었다. 감사의 표시. 별다른 감정을 주지 않는 내 심장에 대한 예의. 나는 미에의 죽음 이후 좀 더 딱딱한 심장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빨리 흘러가 주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면 시간도 빨리 간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기 시작했다.
‘새벽 3시쯤, 감방 문을 두들겨. 그때 즈음, 감방을 한 바퀴 감시하는 교도관이 있을 거니까. 너무 세게 두드리지는 마. 그냥 힘 빠진 소리, 겨우 두들기는 소리를 만들어야만 해. 문이 열리면 거의 쓰러지듯 엎어져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대신 시간은 엄수하도록 해. 그 시간을 놓치면 너의 데이트도 끝나버리고 마는 거니까. 조니는 이번 휴가 후로는 휴가를 얻기가 힘들지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영어회화 공부를 끝나고 그녀가 작은 소리로 읊조려 준 대로 나는 감방 문을 힘없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직 발자국 소리가 들려 오진 않았지만, 나는 정확히 새벽 3시에 감방 문을 살살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의 몸은 거의 쓰러지기 않을까 내 정신이 걱정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나는 그녀의 ‘조언 ’대로 일부러 아프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그 힘없는 소리에 섞여 발자국 소리가 하나둘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문을 두드려 댔다. 하지만 무언가 빠진 느낌. 나는 머릿속으로 슬픈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애절한 추억을 떠올리려 노력하면서 나는 주먹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 교도소의 의료팀은 대학 병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까 너는 어쩔
수 없이 시내 병원으로 이송될 것이다. 응급차의 앞자리에는 내가 있을 거고, 너는 뒤에서 누
워 가면 된다. 일단 교도관에게 발각만 되면 너의 할 일은 그저 누워 있는 거뿐이야. 잠을 자
도 좋아. 대신 내일 오후부터는 좀 바쁘게 움직여 줘야 할 것 같아.”
눈을 떠보니 그녀 말대로 나는 입원실에 누워 있었다. 입원실은 꽤 좋은 곳이었다. 입원 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문병 같은 것도 가본 적이 없는 나에게 입원실은 영원히 살고 싶을 정도로
깨끗하고 편리했다. 작은 티브이도 걸려있고 작은 냉장고에 옷장까지...... 나는 평생 이런 것들
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꽃병이 하나 놓여 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내가 예약한 대로 너는 1시까지 ’ 스타일 미용실 ‘로 가서 ’ 김미진‘으로 예약했다고 해야 하
고, 머리스타일은 너무 바꾸면 안 돼. 스트레이트 파마 정도로 하고 조금만 다듬어 줘. 화장도
해야 할 거고. 그런 후에 미용실 근처 백화점으로 가서 정장 풍의 옷을 골라 사도록 해. 사람들
눈에 띄는 옷은 피하도록 하고. 그리고.... 나면 이제 조니를 만나러 가면 되는 거라고. 신용카
드와 선글라스, 모자는 내가 준비한다. 오랜만의 외출이라고 너무 정신 팔아도 안된다. 이건
일종의 훈련 같은 거야. 너의 새 인생을 위한 훈련. 그뿐이야. 그 이상은 절대 될 수 없다는
걸 명심해.’
나는 내 흉내를 내고서 병실 침대에 누워 있을 그녀를 떠올리며 그녀 흉내를 내기 위해 갈아입은 그녀의 구제 옷을 입고 낮 1시경 스타일 미용실의 유리문을 살짝 밀었다. 나는 오랜만에 닿는 유리의 느낌이 내 심장을 잠시 싸늘하게 얼렸다. 몇 달 만에 다시 나온 세상은 여전했다. 나는 교도소에서 나와 세상과 다시 마주친 것에 대한 감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심장은 얼마나 열린 것일까...... 한 번 얼어붙은 건 녹는데 시
간이 오래 걸리지...... 무엇이 내 심장을 사르르 녹여 줄 수 있을까......
“네? 손님? 뭐라고 하셨죠?”
나도 모르게 다시 중얼거린 말에 미용사가 내 얼굴 가까이로 얼굴을 들이대면서 환한 미소로
변신했다.
“아, 그게...... 원래 파마하는 게 좀 지루해 서요. 시간도 없고...... 오늘은...... 정말 바쁜데...... 오늘은......”
“아....... 그러시군요. 스트레이트 파마를 하시고 싶으시다고 하셨죠? 근데 시간은 없다 하시
니, 오늘은 드라이만 하고 가시는 게 어떠세요? 파마는 다음에 시간 나시면 예약을 하시고 오
시면 되고요.”
‘드라이...... 드라이가 가능했다. 그것도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시간에.......’
그녀도 나도 생각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나는 미용실에서 3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다.
3시간 동안, 뭘 하지? 미용사에게는 우선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다시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녀의 점퍼 오른쪽 속주머니에서부터 느껴지는 딱딱함에 먼저 손을 갖다 대 봤다. 주머니 속에는 그녀의 신용카드가 들어 있을 거라는 나의 짐작은 적중했다. 신용카드는 황금빛이었다. 나는 다시 신용카드를 오른쪽 속 주머니에 넣고 혹시 밑으로 빠지지는 않았나 하는 불안감에 다리 밑을 샅샅이 살펴보고 오른쪽 속 주머니의 딱딱한 질감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안도감을 느낀 적이 있었을까? 최소한 나는 돌아갈 곳이 있다. 그곳이 교도소 일지라도.'
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면서 가슴이 꿍꽝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데이트가 있는 날’
나는 문득 내가 일주일째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아프기 위해서’ 찬물로 대충 씻어서 인지 씻은 느낌이 잘 나지 않고 개운하지 못했다. 나는 남은 시간을 말로만 듣던 찜질방에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찜질방의 긴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멈춰 횡당 보도의 신호등에 파란 불이 켜 지기를 기다리며 나는 목욕을 하기 위해 속옷과 샴푸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머릿속은 내가 앞으로 사야 할 목록의 가격을 빠르게 계산해 가기 시작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나는 눈앞에 서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일기장도 한 권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망할 놈의 영어 강사 같으니라고. 그는 내가 부탁한 일기장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일까. 속옷 한 장, 양말 한 칼레, 일회용 세면도구들이 들어 있는 목욕 세트를 사서 계산대 앞에 섰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돈이 들어 있을 것만 같은 오른쪽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돈이 없다. 다시 내 왼쪽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돈이 없다. 내가 점퍼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을 때 내 뒤에 3명의 사람이 줄을 서 계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현금 없으시면 카드로도 계산되거든요?"
그제야 나는 내 오른쪽 속 주머니의 딱딱한 감촉을 기억해 냈다. 찜질방으로 들어서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간 후에야 나는 내가 산 목욕용품들이 찜질 방 안에서 모두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감옥 안으로 들고 갈 수 없는 바에 나는 그 목욕 용품을 다 쓰고 나가야지 생각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목욕탕엔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행히 찜질방에 대한 얘기는 아는 친구에게서 숱하게 들어온 정보가 있었다. 우선 샤워를 하고 찜질을 하고 티브이도 보고 계란도 까먹고...... 찜질방에 대한 지나친 환상 때문이었을까, 나는 찜질방의 시설이 조금은 시시하다고 느껴졌다. 아니면 내가 지불한 찜질방의 6000원권 입장료가 조금 싼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따가 미용실에 가야 한다는 긴장감에 나는 머리만 3번을 감았다. 때밀이 수건을 갖고 들어오지 못한 것을 잠시 후회하며 몸에 비누칠과 헹구기만 4번을 했다. 이는 2번을 닦았고 탕 속에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다 목욕탕을 나와 버렸다. 찜질이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역시 나는 현대문명의 길치라는 생각에 나는 그냥 찜질 방을 나와 버렸다. 생각보다 시시했다. 찜질방은. 그리고 문득 그녀가 준다는 나의 새로운 인생에 대해서도 같은 감흥을 느껴 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갑자기 허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스타일 미용실로 다시 가 머리에 드라이를 하고 화장을 하고 눈썹까지 다듬었다. 그리고 백화점으로 이동해 약간 캐주얼한 정장 느낌의 옷들을 파는 매장으로 바로 들어가 많이 회색 빛의 짧은 마이에 검고 무릎 아래 길이 정도의 검정 청치마 그리고 마이 속에 받쳐 입을만한 셔츠, 단화까지 한꺼번에 골라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입고 그럭저럭 괜찮아 보여 계산을 하고 예전에 입던 옷과 신발은 쇼핑백에 담아 나왔다. 예뻐지거나 변신했다거나 그래 보이지도 않았고 그와 함께 내 표정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가끔은 감옥을 나가자마자 맨 처음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맘껏 먹을 거라는 상상을 하곤 했다. 이번이 두 번째 수감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옥을 나간 후 맛보는 자유에 대해서 늘 같은 설렘을 같게 되는 것 같다. 감옥에서 나가는 즉시 근처 식당에 가서 가장 좋아하던 돌솥비빔밥이나 콩국수 같은 음식을 사 먹어야지 늘 상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는데 이번 외출은 달랐다. 무언가를 먹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식욕과 희망과의 관계는 한 가지 줄기는 아닌 것 같다. 희망이 생겼을 때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하여 먹어대는 밥,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 희망 대신 채우기 위해 필요한 질량으로 선택하는 밥, 그리고 이번에 내가 선택했던 밥은 이 둘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그런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선릉역 2번 출구를 내서기 전에 걸려 있는 큰 거울에 모습을 슬쩍 확인해 본 후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조니를 만나기 위해 르네상스 호텔로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