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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지에 사는 기쁨

이유 없이 행복한 이유

by 윤슬log


강릉으로 이사와 지내며 나는 길을 걷다가, 차를 타고 가다가, 카페에 앉아 있다가도 이유 없이 행복해지는 일이 많았다.




경포호에서 운동을 한 후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경포호 둘레길은 차량 통행이 각각 1차로씩인 도로라서 앞의 차량이 달리는 속도에 맞춰 갈 수밖에 없었다. 양 옆으로는 벚꽃이 한창이었고, 오른쪽으로는 경포호의 절경이, 직선으로 달리면 경포해수욕장에 닿는 구간이었다.


앞 차가 천천히 가길래 급할 것 없던 나도 슬렁슬렁 속도를 맞추었다. 갑자기 앞에 창문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허공을 가르며 팔을 휘젓는 것이 아닌가. 누가 봐도 '나 지금 너무 행복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잔뜩 신이 난 손이 바람결을 따라 지휘자처럼 리듬을 탔다. 한참 동안 반짝거리던 누군가의 손을 보면서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그 차는 아주 천천히 달렸지만 나도, 내 뒤로 서있던 차량들도 빨리 가라는 사인을 보내지 않았다. 먼 곳에서 달려와 만끽하는 행복인데, 잠깐의 불편쯤은 괜찮다는 배려인 것 같았다.


관광지에서는 무언가 마음이 넉넉해진다. 도시에서의 팍팍한 삶을 나도 살아봤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말이나 여름휴가 때 교통난과 성수기 금액 등을 감안하고서라도 휴양지를 찾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속초에 살 때도 금요일만 되면 붐비는 속초의 대형마트에서 나는 여행객들과 함께 덩달아 설레곤 했다.


강릉은 영동지방 최대의 도시로 KTX까지 연결되어 있어 평일에도 늘 관광객들이 많았다. 서핑하는 사람들, 유람선과 보트와 같이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 배낭 하나 메고 바다를 보러 온 학생들, 알록달록 예쁜 옷 맞춰 입고 온 여고 동창생분들, 바다가 그리운 연인들... 저마다의 사연으로 강릉을 찾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일은 휴양지에 사는 가장 큰 즐거움이 되었다.


귀여움 수집 중



속초에서 지낸 4년을 더하면 물가에 산지도 오랜데 나와 남편은 한 번도 서핑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스노우보드를 타다 대차게 구르는 바람에 두 발이 묶여 보드 위에 서는 것을 무서워하고, 남편 역시 운동에는 취미가 없었다. 그래서 종종 이른 아침에도, 해가 다 진 저녁에도, 추운 겨울 할 것 없이 물 위에 떠있는 서퍼들을 볼 때면 감탄의 박수가 흘러나왔다. 높은 파도를 멋지게 가로지르는 그들의 모습은 대리만족과 함께 짜릿한 스릴감을 주었다.

하루는 '주문진'이라고 써져 있는 액자 구조물 아래 참새처럼 앉아계신 어르신들을 보았다. 겨울 바다를 보러 놀러 오신 분들이었다. 매일 운동하러 오고 가며 여기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귀여운 순간들을 포착하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안목해변에서 본 풍경도 그랬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했던가. 그림처럼 모여들던 갈매기떼의 모습은 분명 장관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먹이 주던 소년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나는 육성으로 웃음이 빵 터져 한참을 바라보았다. 소년들은 과자를 던지다가 감당이 안 됐는지 갈매기보다 빨리 도망쳐 자리를 피했다. 잠깐 벌어진 소동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휴양지에 사는 또 다른 즐거움은 갈 곳이 많다는 것이다. 사람 구경을 하고 싶은 날에는 사람이 많은 곳으로, 평화롭게 쉬고 싶은 날에는 비교적 관광객이 덜한 곳으로 행선지를 정한다. 오죽헌, 경포호, 경포대 해수욕장, 안목해변 등에서는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고 허균 허난설헌 생가, 경포생태저류지, 주문진 등은 소소하게 여유로운 공간이다.

걸을 수 있는 곳도 많다. 성수기나 관광객이 몰리는 특정 장소들을 제외하고는 주차난도 거의 없어 공터에 주차를 하고 바다, 호수, 소나무숲, 공원 등을 자유롭게 걷는다. 항구와 뚝방길, 둘레길도 잘 되어 있어 운동이 필수인 나에게 언제나 좋은 곳이다.


휴양지를 찾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늘 미소 가득이다.

도시에 살면서 가끔 카페에서 바라보던 세상에는 항상 바쁜 걸음으로 어딘가를 가고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핸드폰을 보면서 걸어가는 사람, 통화를 하며 지나가는 사람도 모두 분주해 보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가 본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지 않고 바다를 거닐고 호수를 둘러본다. 소나무 숲에서 사진을 찍으며 까르르까르르 어딜 가나 웃음꽃이 만발한다. 맛집 앞에서 오랜 시간 줄을 서면서도 짜증 대신 "맛있을까? 정말 맛있을까?" 하는 설렘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이곳이 좋다.


무엇보다 휴양지에 살면 다른 파라다이스를 찾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여름휴가를 가야겠다는 생각, 어디 한적한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욕구가 별로 없다. 일단 인구 밀도가 대도시에 비해 현저히 낮고, 집 앞뒤로 바다와 산, 호수와 강, 심지어는 근처에 온천도 있으니 더 좋은 곳을 갈망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바다를 떠나지만 않으면 늘 바다 곁에 머물 수 있으니 만족스럽다.

바다 옆에 살고 있으니 시크하게 커튼을 내리고 누워있는 여유도 부려본다. 창문을 열면 온통 바다다.

'아, 이러려고 여기 왔지.'

마음이 흡족하다.





휴양지에서 사는 기쁨은 이렇게 많다. 이유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기 와서 알게 되었다. 자연의 품 안에서 누군가 행복해하는 모습,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이 여행을 내가 준비해 놓은 것처럼 즐거웠다.


물론 관광지 주민들이 겪는 단점들도 있다. 교통난, 비싼 물가, 외지인 운전이 많다 보니 위험하게 주행하는 사람도 많고, 여름의 바다는 무조건 관광객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평일에도 맛집은 한 시간 이상 웨이팅이 기본이라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돌아선 경험도 많다. '그냥 다른 날 오면 되지.' 하고 나오지만 그 다른 날이 언제가 될지는 요원하다.

속초에 살 때도 그랬다. 봄에 목우재 터널 너머로 설악에 벚꽃 터널이 지면 상춘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일주일에 세 번씩은 산을 올랐는데, 봄에는 꽃이 피어서 가을에는 단풍이 예뻐서 산에 가지 못했다. 여름에는 해수욕장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니 바닷길 아닌 쪽으로 항상 우회해서 다녔다.

그래도 나는 휴양지에 사는 게 좋다. 늘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다. 늘 자연이 있고 맑은 공기가 있다. 늘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고, 그게 싫으면 조용히 쉴 수 있는 현지인 스팟도 많다. 언젠가 주문진을 떠나게 되면 나는 또 한동안 이곳을 그리워하겠지. 우리만의 파라다이스를 찾아온 이곳에서 귀여운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유 없이 행복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매일 조금씩 행복한 순간들이 모여 나날이 기쁜 삶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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