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 마시는 커피
강릉은 명실상부한 '커피의 도시'다. 2025년 5월 9일 강원방송 기사에 따르면 현재 강릉의 커피 전문점은 869개, 월간 원도 소비량 2만 5000t에 벌써 16년째 커피축제를 열고 있다. 스타벅스가 아메리카노 대중화에 신호탄이었다면, 핸드 드립 열풍의 시작은 강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1세대 바리스타라고 하는 '박이추' 선생님이 운영하는 카페도 있고, 창고형 카페의 유행을 이끈 '테라로사'도 빼놓을 수 없다. 안목항 커피거리는 횟집만 즐비하던 작은 항구에서 지금은 500곳 가까이 되는 카페들이 늘어선 커피의 중심지가 되었다.
강릉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는 '툇마루'의 흑임자 커피다. 평일에도 웨이팅이 필수인 카페지만 어렵게 받아 든 커피 한 모금을 맛보는 순간, 줄을 선 노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단박에 깨달을 수 있다.
'집에서 내려 먹는 커피가 제일 맛있다.'라는 소신을 가진 우리 아빠의 입맛도 사로잡아 버린 툇마루 커피. 부모님 두 분이서 세 개를 시키는 마성의 커피인지라, 실제로 둘이 온 손님이 네 잔을 주문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물론 입맛은 지극히 주관적인 부분이고, 나는 해당 카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커피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 기준에 흑임자 커피 같은 크림 커피는 많은 카페에서 시그니처 메뉴로 삼고 있는데 반해 '크림'과 '커피' 둘 다 조화롭게 맛있기가 정말 힘들다. 크림은 너무 달고, 커피는 너무 써서 전반적인 밸런스가 맞지 않을 때가 많고, 크림의 종류나 재료에 따라 커피의 맛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같이 커피값이 밥값만큼 오른 물가를 생각하거나, 가끔 기분낼 때 사 먹는 것을 고려하면 이왕이면 실패 없이 맛있는 커피를 찾아가게 된다.
강릉에 카페가 정말 많지만 나의 원픽은 언제나 툇마루 흑임자 커피다. 다른 디저트 필요 없이 오롯이 커피 맛만으로도 오감을 만족시키기 충분하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비우고, 얼음까지 탈탈 털어 넣어도 맛있는 흑임자 커피.
층간소음 이슈로 부족한 잠을 사수하고 있어 커피의 도시 강릉에 와서 커피를 멀리하고 있는 나지만, 그래도 가끔 서울 가는 일정이 있거나 다른 곳으로 장거리 여행을 갈 때면 꼭 여기에 들러 커피 한 잔 즐기고 간다. 커피의 고장에 살면서 핸드 드립이며 각 카페마다 내세운 대표 커피들을 모두 맛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선택은 '확실히 맛있는 커피'에 대한 갈망이 더 크기 때문에, 내가 충성 고객임을 한번 더 확인할 뿐이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신상 카페 개발을 해야 다른 커피들의 맛도 보고, 미식의 세계관도 넓어질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역시가 역시'라고 내 입에 맞는 게 최고지 싶다.
하루는 브런치에 '강릉의 커피'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하면서 강릉에서 유명한 초당옥수수를 모티프로 한 커피가 있다고 해서 방문해 보았다.
'갤러리 밥스'라는 상호로 솔로지옥 2에 출연한 분이 운영하는 카페라고 한다. 나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왔다가는 것처럼, 언제나 카페 앞은 줄지어 들어가는 차들로 가득했다.
가게 오픈 삼십 분 전부터 줄을 섰지만 이미 우리 앞에는 길게 늘어선 관광객들의 행렬이 있었다. 주말 11시면 이제 막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인데, 대단한 열정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젊은 여행객들만 있는 게 아니라 현지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무리에 섞여 있었다.
'와... 그렇게 맛있나?'
기대감이 점점 솟구쳤다. 11시 30분. 가게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인파가 우르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문 열기 전에 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회전이 빨랐다.
우리가 초당 옥수수커피 2잔과 초당 옥수수 소금빵을 주문했다. 소금빵은 나오자마자 순삭 해서 안타깝지만 사진으로 남기니 못했다. 겉은 소보로 빵처럼 달달하고 바삭한 식감에 안에는 소금빵 특유의 버터리함이 가득해 풍미가 좋았다.
커피는 한 모금 마시면 옥수수 맛과 향이 은은하게 느껴지며 살짝 씹히는 정도였다. 내 기준에는 조금 달았지만 달아서 맛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커피를 끝까지 다 마시면 잔 아래 곱게 갈린 옥수수 알갱이가 침전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잘 섞이도록 적당히 흔들어가며 먹으면 좋을 것 같다.
강릉의 대표 간식인 초당옥수수를 재료로 한 커피를 맛보고 나오면서 '순두부 커피'라는 또 다른 간판을 보았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두부 젤라또는 들어봤어도 순두부 커피라니...'
강릉은 순두부로도 유명하다. 순두부 마을도 있고, 하얀 순두부를 응용한 짬뽕 순두부 맛집도 많다. 하지만 순두부를 커피에까지 접목했을 거라고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는 바, 아직은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음에 멀리 갈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먹어보리라고 생각하면서 서둘러 운전을 시작했다.
커피의 도시에 살면서 좋은 점은 질 좋은 신선한 원두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 유명한 커피 체인점 외에도 맛있는 카페들이 많다는 점, 커피만큼이나 다채로운 디저트가 발달했다는 점, 카페들이 비교적 한 곳에 몰려있어 접근이 용이하고 골라마실 수 있다는 점 등이 있다.
건강 체질에 커피 한 잔 정도 마셔도 자는 데 끄떡없는 옛날이었다면 지금보다 자주 커피 수혈을 했을 것이다. 상황이나 건강을 고려해서 요즘은 커피 대신 '차의 시간'을 즐기는 데 익숙해지려고 한다. 남편과 함께 따뜻하고 맛있는 차를 마시고, 특별한 차를 파는 곳이 인상 깊은 카페로 남는 것을 보면 그래도 많이 적응된 것 같다.
다만, 한 여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그 유혹이 너무나도 강력해서 가끔 디카페인으로 마시곤 한다. 언제나 확실히 맛있는, 실패 없는 곳을 엄선해서 가므로 아쉬움은 전혀 없다.
커피는 현대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기호품이다. '기호품'이라는 말은 거리감이 느껴져 동반자, 친구, 벗이라 불러도 이질담이 없을 정도로 가까운 음식이 되었다.
커피의 도시라는 강릉. 그 언저리에 살고 있는 나는 커피가 그리울 때면 그곳으로 달려간다. 비록 자주 마실 수는 없지만 '향기로 마시는 커피'라는 말처럼 눈으로 향으로 맛보고 즐기며 커피의 도시에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