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2K <헤어진 후에>
나의 밀레니엄은 꽃미남 밴드의 노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던 시절, 티비에서 본 코지 오빠의 미소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Y2K는 국내 최초의 한일 합작 밴드로 1집 타이틀곡 '헤어진 후에'가 큰 인기를 끌면서 각종 예능과 음악프로그램을 휩쓸었던 그룹이다.
"마니 고민 해쏘쏘. 그 자릴 지켜야 하는지. 이제 너와 난 끝난 사이니까."
살랑살랑 눈웃음을 날리며 노래하는 코지를 보면 그의 어설픈 한국어 발음도 다 용서할 수 있었다. 설령 그가 노래를 한 소절도 부르지 않고 카메라를 보며 미소만 띤다고 해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그런 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길보드 테이프가 아닌 음반 가게의 정품 테이프를 사는 일뿐이었다. 학생에게는 테이프 하나도 참 큰돈이었다.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레코드샵에 방문하자 사장님은 슬쩍 코지 사진을 보여주셨다. 사진과 포스터도 판매하는 곳이었다. 열네 살 인생에서 가장 심각하게 골몰한 후 코지 오빠의 사진을 골랐다. 테이프를 사고 너무 기뻐 투스텝으로 뛰어나오던 것도, 사진이 구겨질 새라 교과서 사이에 곱게 넣어 온 것도 생생하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연예인들이 나오는 잡지를 구매하고 Y2K의 포스터를 얻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그들의 음악과 사진, 대형 브로마이드 그리고 나의 큰 목소리와 함께 Y2K 사랑은 우리 반 전체로 퍼져나갔다. 컴퓨터 수업에서 선생님이 컴퓨터 버그인 'Y2K'에 대해 설명할 때도 친구들은 낄낄거리며 일제히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적어도 우리 반에서는 Y2K가 밀레니엄 버그보다 나의 최애 가수로 더 유명했다.
그 즈음이었을까.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 그러고 보면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면서도 늘 하늘 위에 떠있는 달이 어딘가 모르게 영험해 보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나는 달만 보면 덥석덥석 소원을 말했다.
"달님, 코지 오빠 만나게 해 주세요. 저 진짜 공부 열심히 하고 엄마 아빠 말 잘 들을게요. 우리 코지 오빠 한 번만..."
달님이 귀가 아플 때까지 빌고 또 빌었다. 차를 타고 지나갈 때도, 학원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도, 어슴푸레 뜬 낮달에게도 소곤거렸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학교 쉬는 시간에 친구가 웬 전단지 하나를 내밀었다.
365 마트 그랜드 오픈
사인회: Y2K
일시: 2000년 1월 7일
Y2K가 우리 동네 농산물 마트 오픈식에서 사인회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오빠들이 우리 동네에 온다니. 꿈★은 이루어진다. 간절하면 통한다. 나의 기도가 드디어 하늘에 닿았구나 싶었다. 달에게 빌라는 말은 틀림없는 참말이었다.
1월의 거센 한파도 오빠들을 향한 나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화장하는 법은 몰랐지만 그래도 나름 신경 써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사인회에 갔다. 멤버 수에 맞춰 세 줄로 늘어선 대열에서 코지 오빠의 줄은 단연 길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뭐 대수랴. 살포시 그의 앞에 줄을 섰다.
한참을 기다려 사인을 받았을 때 너무 떨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본어 인사도 준비해 갔건만 호달달 떨면서 실물의 코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싸인 한 장 덜렁 받고 돌아왔다. 매일 밤 달만 보면 자동으로 두 손 모으고 간절히 빌었던 동경의 대상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코지의 싸인은 앨범에 잘 넣어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작년 MBN '한일톱텐쇼'를 통해 23년 만의 Y2K 완전체 무대를 볼 수 있었다. 활동 종료 이후 두 멤버는 일본에서 밴드 생활을 이어갔고, 고재근 역시 뮤지컬 활동이나 미스터트롯 무대를 통해 소식을 알렸지만 세 명이 한 무대에 선 것은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률 1위 등 큰 화제성을 모으면서 Y2K는 단독 콘서트도 열게 되었다. 직접 가지 못했지만 SNS를 통해 한국어로 소통하는 코지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1인이다. 그는 꾸준히 한국어를 공부해 영상도 올리고, 댓글과 자막으로 한국 팬들과 소통하기도 한다.
비록 새하얀 피부 대신 검게 그을린 남성미가 가득하고, 꽃 미소를 날리던 소년에서 건장한 근육질 남자로 변했지만 그래도 괜찮다. 영상 대부분이 소주에 삼겹살을 먹는 얼큰한 브이로그라 할지라도, 오빠가 세상 야무지게 술병을 흔들며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폭탄주를 만다 할지라도. 나의 사춘기를 열어준 꽃미남 밴드의 얼굴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자 아이의 아빠가 된 코지에게
"너는 밀레니엄 버그보다 더 강렬했던 나의 밀레니엄 러버였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한창 Y2K에 빠져있던 시절 빼빼로 데이였다. 불현듯 나는 우리 오빠에게도 빼빼로를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벽에 붙여놓은 포스터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도움닫기 삼아 대형 브로마이드에 빼빼로를 갖다 대려는 찰나 무게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피아노 위에 놓인 도자기 장식품이 맥없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가 나간 귀퉁이를 살짝 수습해 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갔다. 엄마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맛있는 아몬드 빼빼로를 나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정성으로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도 갔겠지. 이렇게 갸륵한 마음으로 효도를 했다면 심청이가 되었을 텐데. 심청이도 S대생도 못 된 나는 지금도 가끔 코지 특유의 발음 그대로 '헤어진 후에'를 열창한다.
"마니 고민 해쏘쏘. 그 자릴 지켜야 하는쥐~"
이상하게 쳐다보는 남편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래도 괜찮다. 밀레니엄 러버는 마음속에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