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차 마드리드
눈 돌리면 보이는 벽화마저 예술이었던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한걸음 뗄 때마다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엄마에게 똑같은 사진을 왜 그렇게 많이 찍냐고 물었다.
엄마는 다신 못 올 텐데 사진으로 많이 남겨둬야 된다고 했다.
끝내 뱉지 못한 '또 오면 되지' 그 짧은 한마디가 이렇게나 무겁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저 나는 엄마의 아쉬움을 달래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 혹여 희망고문이 될까 봐 애써 짓는 미소 뒤에 저려오는 마음을 감췄다.
마드리드에 왔으니 마드리드 맥주는 먹어봐야 한다던 엄마.
서로를 알코올쓰레기라 부르면서도 우리는 호기롭게 마드리드 맥주를 5캔이나 담았다.
마요르 광장 등 빠르게 마드리드 관광지를 훑어본 후 공항으로 향했다.
마드리드 공항 면세점에서 와인과 올리브유를 잔뜩 사서 팔이 빠질 듯이 아팠다. 이렇게 무거울 줄 알았다면 적당히 살 걸. 온 김에 스페인 와인을 사야겠다고 고집한 것은 기념품을 가장한 욕심일 뿐이다.
공항 안에는 카트가 있었는데 발견하지 못한 바람에 엄마와 무거운 짐을 나눠 들곤 한참을 들고 걸어야 했다. 게이트까지 꽤 멀어서 "팔 빠질 것 같아"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때 2차 모녀전쟁이 일어났다.
무겁게 그걸 다 왜 샀냐는 '나'와, 공항에서 길도 못 찾냐는 '엄마'가 맞붙은 것이다.
둘 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 날카로운 말을 골라 서로를 향해 겨눴다. 서로가 고른 무기는 너무 날카로워 살짝만 스쳐도 치명타였다.
엄마는 해외여행을 딸과 함께 간다는 것이 꽤나 맘에 들었는지 떠나기 한참 전부터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입학하자마자 장학금까지 받으며 잘 다니던 대학을 갑자기 휴학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엄마는 뭐 하려고 그러냐고 묻지 않고 "그럼 우리 둘이 제주도 가자"라고 했다. 그때 갔던 제주도는 여태 갔던 열댓 번의 제주도중 가장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엄마도 나와 같을까?
몇 년 전에 우리 둘이 제주도 갔을 때 좋았다며 또 이렇게 둘만 여행 오니까 그때 생각난다며 행복해했는데.
나도 스페인 가기 전부터 문득문득 행복했다? 야근하고 늦은 저녁을 먹을 때에도, 만원 전철에 몸이 찌부될 때에도 다가올 엄마와의 여행날만 기다리며 버텼어.
그리고 여행이 시작되자마자 깨달았지. 엄마의 행복을 보는 게 내 행복이구나.
세상에 나 말고 나만큼 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 사랑이라던데,
난 사랑이 내 행복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더 바라는 거라 말하고 싶어.
한국에 있을 때에는 해야 할 일도 많고 눈에 밟히는 것도 많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신경 쓰게 되는 것들로 참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 나는 그대로이고, 환경만 바뀌었을 뿐인데 정말로 해야 할 생각들이 떠오르고 봐야 할 것들을 보게 되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물리적 시간은 8시간이나 빨라지고 심리적 시간은 그의 10배는 더 빨라질 것 같지만, 여행 중에는 스페인에서만 할 수 있는 생각을 충분히 하고 왔다고 생각한다.
머리뿐 아니라 마음까지 말랑말랑해져 돌아왔다.
스페인을 다녀와서 잊고 있던 여행의 이유를 찾았다. 그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