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B를 처음 만난 날은 2005년 신입생 OT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있던 A를 억지로 끌고 간 OT 첫날, 그는 복학생 환영 사발식으로 후배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대다수가 상상하는 것처럼, 혹은 그보다 안 좋은 쪽으로. 그때 나와 함께 A의 뒤치닥 거리를 해 준 것이 막 2학년이 된 B였다. B는 굳이 제 할 일이 아닌데도 묵묵히 바닥을 닦고 옷을 빨았다. A는 다음날 점심쯤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야. 내 옷 어디 갔냐?”
“저 쪽 방에 널어놨다.”
“왜?”
“기억 안 나냐?”
“사발식하고 잔 거 아냐?”
“그 사이에 뭔가 빠졌다.”
“...... 벗었냐?”
“그건 자주 봤는데 토하면서 벗는 건 처음 봤다.”
“아 씨......”
“19금 들어가기 전에는 막았으니까 걱정 마.”
“이번 학기 망했네. 암튼 고맙다. 올라가서 밥 살게.”
“난 됐고 B한테 밥 사.”
“B?”
“앞머리 일자 뱅헤어.”
“뱅헤어가 뭐야?”
“...... 이 군바리 새끼......”
A가 B에게 밥을 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둘이 친해진 것은 분명했다.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둘이 사귀냐?”
“뭔가 앞에 많이 생략된 거 같지 않냐? 뭔 소리야?”
“너랑 B랑”
“...... 네 가 친구 연애사업을 망치려고 어디서 그런 유언비어를.”
“아냐? 요즘 둘이 자주 붙어 다니길래.”
“전공 3개를 같이 듣잖아. 공강도 비슷하고.”
“같이 수업 듣고 밥 먹고 하다가 잘되면 사귀는 거지.”
“에이~ 걔는 그냥 후배야, 후배.”
“왜? B가 어때서?”
“내 스타일 아냐.”
“네 스타일이 뭔데?”
“적어도 단발에 뱅헤어는 아니지. 난 긴 생머리가 좋다고.”
그런 A를 보며 친구들은 한 가지 내기를 했다. 1년 안에 둘이 사귄다, 안 사귄다. 나는 사귄다에 걸었고1년 뒤에 다른 몇몇과 함께 거하게 술을 샀다. 다시 해가 바뀌고 A는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갔다. 딱 3년만 잠수 타겠다는 말과 함께.
“고생했다.”
“고생은 뭘......”
“괜찮냐?”
“안 괜찮으면 어쩌겠어. 대학원은 할 만하냐?”
“후배들이 대학원 간다고 하면 다 말리고 있지. 대학원 갈라고?”
“아니, 이제 공부하는 거 지겹다. 취업 준비해야지.”
“원서는 쓰고 있어?”
“아니. 뭘 먼저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 물어볼만한 애들도 없고.”
“맞다. 너 B 알지?”
“B?”
“걔가 S그룹 인사팀 갔거든. 한 번 연락해 봐.”
근 2년 만에 본 B는 깜짝 놀랄 만큼 변해있었다. 대학 시절 내내 트레이드 마크였던 머리스타일은 긴 생머리로 변해있었다. 바뀐 머리스타일과 검은색 투피스 정장 때문이었을까? 가볍게 통통 튀던 말투도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오랜만~”
“오빠, 잘 지내셨어요? K교수님 연구실 들어가셨다면서요?”
“응. 덕분에 죽지 못해 살고 있다.”
“야~ 너 완전 예뻐졌다~”
“오빠는 완전 늙었는데요? 고시 공부가 힘들긴 한가 봐요.”
“......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얘가 사회생활 헛 했구만.”
“이제 뭐 2년 찬데요. 그래도 오빠보단 더 한 듯.”
“미안. 둘이 밥 먹어라. 나 교수님 호출이다.”
“얘기하고 나온 거 아니었어?”
“얘기야 했지. 우리 교수님 5분마다 마음이 바뀌는 사람이라.”
“끝나면 전화해. 술 한 잔 해야지.”
“오빠. 술 마실 생각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자소서 한 장을 더 써요.”
“...... 술은 다음에 먹자.”
A는 하반기 공채에서 회사 7개에 서류를 통과했다. 7번의 인적성검사를 보고, 4번의 실무면접을 보고, 2번의 임원면접을 봤다. 그리고 다시 취준생이 되었다. 마지막 회사의 합격 발표날 A는 나와 함께 술을 마셨다. 기분이 우울해서였는지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A는 반쯤 취해있었다.
“고생했다. 그래도 임원면접까지 간 게 어디야. 상반기 때는 어디든 될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취준생이 취업 말고 중요한 게 있냐?”
“엄청 중요한 게 하나 있지.”
“뭔데?”
“야.”
“왜?”
“네가 봤을 때 B 어떠냐?”
“B? 많이 예뻐졌더라.”
“그치?”
“너......”
“내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지금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이럴까?”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되지 뭐 이리 말을 돌려?”
“그러게......”
“걔도 지금 만나는 사람 없지 않아?”
“그렇지.”
“그럼 사귀자고 해. 솔직히 그때 너네 둘이 진짜 사귈 줄 알았는데.”
“내기까지 했다며?”
“들었냐?”
“응.”
“아무튼 한 번 진지하게 얘기해 봐. B도 너한테 마음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왜?”
“아무것도 없잖아. 아직 대졸도 아니고. 회사 명함 하나는 가져야 하지 않겠어?”
“...... 너 그러다 놓친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란 게 있다.”
“아는데, 그래도 지금은 좀 아닌 것 같아.”
B의 사정없는 자소서 첨삭과 면접 연습이 있어서인지 반년 뒤에 A는 취업에 성공했다. 우리는 학교 앞에 자주 가던 술집에 모였고, 합격한 A와 합격시킨 B는 신나게 마셔댔다. 새벽 1시가 넘었을 때, A는 늘 그렇듯 옷을 반쯤 벗다만 채로 구석에 쓰러졌고, B는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B 먼저 깨워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B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오빠.”
“안 그래도 너 깨울라고 했는데 잘 일어났네. 너 내일 출근해야지. 얼른 택시 타고 집에 가라.”
“오빠.”
“왜?”
“나 어때요?”
“...... 뭐가?”
“나 학교 다닐 때보다 예뻐지지 않았어요? 살도 빠지고.”
“예뻐졌지. 그때도 예뻤어.”
“그쵸? 근데 저 사람은 왜 저래요?”
“쟤 술 많이 마시면 저러고 자잖아.”
“아니, 그거 말고. A 오빠는 나 안 예쁜가? 내가 여자로 안 보이나 봐요.”
술기운이 싹 사라졌다. 바보 같은 친구야. 내가 네 연애사업에 투자를 좀 해볼게. 나중에 성공하면 나한테 지점이라도 하나 내주라.
“내가 이런 얘기 하는 게 맞는가 싶지만, 전에 A도 너 좋다고 했어.”
“그래요? 전혀 아닌 거 같던데?”
“아냐. 진지하게 고민하더라고.”
“근데 왜 사귀자고 안 해요?”
“그때 면접 떨어지고 나서 자신이 좀 없었나 봐. 너는 벌써 회사 다니고 있는데 A는 아직 졸업도 못했으니까.”
“오빠. 남자들이 착각하는 게 있어요.”
“뭔데?”
“남자들은 멋진 남자가 되어야 여자 옆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근데 정작 여자들은 옆에 있어주는 남자를 더 원한다구요.”
택시를 타기 전에 B는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아까 했던 얘기는 A한테 절대 하지 말라고. 이대로 선후배 사이로 지낸다면 그저 그렇게 될 인연이니 상관하지 말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던지고 집으로 갔다. 나는 B의 얘기에 공감했고, A는 아까보다 옷을 조금 더 벗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숨이 나왔다.
- 오늘 시간 되냐?
- 타이밍 좋네. 교수님 출장 가셔서 오늘 안 계신다. 학교 오게?
- 가난한 대학원생 밥이나 사줄라고.
- 나야 땡큐지.
“여~ 오랜만~”
“회사 생활 널널한가 봐? 살쪘네?”
“다 술 배야. 회식이 엄청 많다.”
“운동 좀 해. 세 자리 넘는 거 아냐?”
“아직. 간당간당 하지만.”
시시콜콜한 주제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B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B는 잘 지내?”
“요즘 또 취업 시즌이잖아. 엄청 바쁜가 봐.”
“꾸준히 연락하나 봐?”
“뭐. 같은 직장인이잖아.”
“친구야.”
“응?”
“내가 널 10년 넘게 봤잖아.”
“응.”
“그냥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해. 차이더라도 고백은 해 봐라.”
“나 이제 막 신입사원 딱지 땠어. 학자금 갚으려면 아직 2년은 더 걸리겠더라.”
“아 이 답답한 새끼. 나중에 한 60살에 집 장만하고 결혼하겠네.”
“......”
“A야. 이 형님이 너를 위해 준비한 멋진 말이 있단다.”
“뭔데?”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넌 어리석은 사람이냐? 보통 사람이냐? 현명한 사람이냐?”
“......”
“내가 볼 때 넌 어리석었고, 지금은 그냥 보통 사람인 거 같아.”
“......”
“뭐해?”
“응?”
“생각나는 사람 있으면 당장 전화해라.”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A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끄러운 술집 밖으로 나갔다.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인연'이란 주제로 뭘 쓸지 한참 고민하다가 피천득 작가님의 <인연> 중의 문장을 보고 생각나서 적어봤습니다. 쓸데없이 길어졌네요. 모쪼록 이 매거진에 한발 담그신 작가님들 모두 좋은 인연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