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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조 Jul 28. 2022

명운과 정윤

그녀는 언제나 눈이 부셨다. 얼굴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정말이지 그녀는 눈이 부셨다. 일반적인 미인형은 아니지만(어쩌면 못생겼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명운은 정윤에게 한눈에 반했다. 동그랗고 작은 눈은 말간 갈색이었고 첫눈이 소복이 쌓일듯한 긴 속눈썹과 새끼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작은 코. 깨끗한 콧잔등엔 작은 갈색 점이 하나 있었다. 살짝 튼 핑크색 입술은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극대화시켜주었다. 작은 펜던트가 잘 어울리는 가느다란 목과 한 손으로 쥐기에도 작은 어깨. 키는 백육십오 정도로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손발도 작고 가슴도 작고 허리도 굉장히 얇았다. 쇄골이 유난히 도드라져 그다지 파인 옷이 아닌데도 섹슈얼한 느낌을 주었다(겨울에는 괜히 더 추워 보였다). 터틀넥을 입어도 쇄골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어깨까지 오는 단정한 갈색 머리는 그녀의 방 창가에 걸린 연보라색 쉬폰 커튼처럼 엷은 바람에도 살랑거렸다. 목덜미에선 언제나 우유 아이스크림 같은 냄새가 났고(그녀는 향수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는데, 어떤 향수를 뿌려도 결국에는 곧 우유 아이스크림 냄새로 바뀌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짧은 손톱은 유난히 붉은빛을 뗬다. 갓 떨어진 복숭아처럼 그녀의 뺨과 팔꿈치, 무릎과 발꿈치는 늘 불그스름했다. 싱그럽다는 단어를 형상화한다면 절대적으로 그녀일 것이라고 명운은 생각했다.


그녀의 피부는 몹시도 약해서 얇은 책에도 손을 베었다. 조심성이 없는 성미라(본인은 항상 조심한다고 말하지만) 책을 읽을 때마다, 글씨를 쓸 때마다 반드시 꼭 한 번은 손을 베었다. 책장을 넘길 때에는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이, 글씨를 쓸 때에는 왼쪽 손목이나 손목 바로 위 손바닥이. 여리게 맺힌 피는 혀로 살짝 핥고는 손으로 슥슥 닦아냈다.


언제나 민낯이던 그녀는 얌전한 외모와는 달리 털털한 성격이어서 누구와도 곧잘 말을 텄다. 소매 실밥 같은 건 동그랗고 작은 송곳니로 톡- 뜯어내었다. 책을 읽거나 일을 할 때에는 얇은 금테 안경을 썼지만 평소엔 잘 보이지 않는 채로 그냥 있었다. 왼쪽 귀에만 작은 피어싱 두 개가 있었고(처음 만났을 땐 귓불에 하나였는데, 어느 날 데이트 중에 갑자기 귓바퀴 쪽에 핑크색 큐빅이 박힌 걸로 하나 더 뚫었다) 갈색 가죽 밴드에 스퀘어 헤드 손목시계를 찼다. 하얗고 얇은 손목과 깨끗한 손톱에 아주 잘 어울리는 시계였다. 그 외에 액세서리를 한 적은 거의 없다. 브라운 계통의 옷을 즐겨 입었고 특히 낙낙한 핏의 원피스가 많았다. 귀여운 모자도 자주 썼다. 바게트를 닮은 진한 갈색 슈즈가 그녀의 최애 슈즈였다(역시나 조심성이 없는 그녀는 발도 참 자주 다쳐 한여름에도 앞이 뚫린 슬리퍼 같은 건 신지 않았다. 명운은 그녀가 정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루에 한 번은 다쳐야 속이 시원한 사람 같아 자주 속이 상했다).


그녀의 핸드폰에는 누구나 다 있는 카카오톡이나 다른 메신저가 전혀 없었다. 핸드폰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명운과 연락할 때 말고는 손에 들고 있지도 않았고 명운을 만나면 아예 집에 놓고 다녔다. 기본 어플 외에는 고양이를 키우는 소소한 게임뿐이었다.


그녀는 동물을 매우 사랑했다(사람에 대해선 애착이 없지만). 강아지, 고양이는 물론이고 사자와 늑대, 여우, 하이에나 등 맹수들도 굉장히 귀여워했다. 주말엔 유기동물 보호소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행복해했다. 그녀 덕분에 명운은 학창 시절 이후 처음 봉사활동이라는 걸 해봤다.


그녀는 배려심도 무척 깊어서 섹스를 할 때 명운을 꽉 끌어안으면, 손톱을 숨기고 살짝 주먹을 쥐었다. 명운은 그녀와의 섹스를 좋아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다. 명운은 그녀의 목소리, 표정, 눈빛, 손짓을 전부 기억한다. 그녀는 명운에게 원하는 행동을 굳이 말하지 않고도 항상 얻어냈고, 명운은 그녀가 원하는 걸 주며 상상할 수 없는 만족감을 얻었다. 명운에게 그녀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완벽하지 않은 인격과 외모 또한 완벽했다. 그녀의 모든 표정과 말투, 습관을 사랑했다. 하루에 몇 번이고 달려와 안기는 몸, 명운보다 몇 배는 느린 책장 넘기는 소리, 한동안 조용해서 들여다보면 어느새 잠이 들어 있는 모습까지. 소록소록, 가냘픈 숨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꼼지락 대면, 명운은 그녀의 두 손을 한 손으로 감싸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면 그녀는 명운의 가슴팍에 깊게 파고들어 더 깊은 잠을 청했다.


그녀는 공원의 분수를 싫어했다. 중력을 거스르는 게 싫다나. 자연스럽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약간의 혐오가 조금씩 있었다. 핸드폰이라든지 텔레비전이라든지 자신의 시간을 방해하는 것들. 잦은 연락이나 아파트의 안내 방송 등.


손으로 편지 쓰는 걸 좋아해 친구들에게 종종 선물과 편지를 보내곤 했다. 명운도 그녀와 연애를 하는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몇 백 통을 받았다. 꼭 기념일이 아니어도, 그녀는 종종 엽서나 편지로 마음을 전해주었다.


명운은 그녀가 마지막 사랑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명운에게 연애는 항상 성적인 요소였다. 외적으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거침없이 대시했고, 그건 항상 통했다. 하지만 감정이 길게 가지 않아 대개 몇 주면 본인 쪽에서 별다른 말도 없이 끝내버렸다. 그런 그가 무려 5년 동안 한 여인에게 푹 빠져있었던 건 명운으로서는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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