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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조 Aug 03. 2022

나는 죽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죽어 있었다. 죽은 주제에 정신을 차렸다니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조금 전(내 생각에) 찰나의 순간, 정신이 아찔해짐과 동시에 아득해지더니 깊고도 짧은 암흑이 있었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한 기분이 든다. 다만, 나는 죽었다. 죽은 사람이다. 누군가 마중을 나온다거나 배를 타지도 않았고 무서운 일은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알 수 있다. 나는 죽었다.

지금 이 길을 걸은 게 얼마나 됐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풍경이 내가 상상하는 대로 바뀌며 이어지고 있다. 왜, 무얼 위해 걷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걸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에 무작정 계속 걷고 있는 것이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느낌이랄까.

아무리 걸어도 몸은 점점 더 가뿐해질 뿐이다. 전혀 피곤하지도, 눈이 뻑뻑해지거나 숨이 차지도 않는다.


아주 오래전 키우던 강아지를 만났다. 언제나 나를 지켜주던 강아지다. 그런데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내 친구들, 심지어 부모님 이름까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느낌과 관계에 대한 기억만 있을 뿐. 이상하다. 그런데 슬프진 않다.

새하얀 이 강아지는 나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 우리 집 건너편 미용실의 큰 개가 나를 위협하면 어디선가 항상 달려와 온몸을 던져 막아주었다. 어느 날은 자전거를 타고 심부름을 가는데 그 큰 개가 자전거 앞바퀴를 크앙 물었다. 너무 놀라고 무서워 소리를 내 엉엉 우니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물리쳐주었다. 무서웠을 텐데. 우리 강아지는 몸집이 작은 스피츠였다. 피투성이가 된 강아지를 데리고 집에 가 또 엉엉 울었다. 피투성이의 강아지는 나를 핥아주었다. 정말이지 자신이 줄 수 있는 온 마음과 용기를 내게 온전히 다 주었다.

언젠가는 맨발로 다니는 게 아플까 봐 신발을 신겨 주었다. 그게 자꾸 벗겨져 끈으로 꽁꽁 묶어주었는데, 피가 안 통해 하마터면 다리를 다 잘라야 할 뻔했다. 나는 또 울었고 다리가 아파 걷기도 힘든 강아지는 나를 또 핥아주었다.

어느 날 밤엔 밖에 나가고 싶다고 끙끙 우는 소리를 했다. 자다 깬 나는 강아지를 위해 대문을 열어주었는데 그날 이후 강아지는 사라졌다.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더 이상 그 큰 개에게서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잡혀간 걸까 사고라도 난 걸까. 아님 그저 유유히 여행을 하고 있는 걸까. 이렇든 저렇든 두렵고 슬펐다. 미안한 마음에 쓴 편지가 아직도 내 어릴 적 앨범 속에 있는데. 너를 다시 만나 기뻐. 죽는다는 게 마냥 나쁜 일은 아니구나.


저 앞에 할머니가 보인다. 눈물이 나거나 놀랍진 않다. 돌아가신 후에도 워낙 꿈에 자주 나오셨고 내 죽음을 인지한 순간 할머니를 만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내가 인생을 살며 가장 사랑한 사람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관이 불구덩이에 들어갔었을 때. 도저히 용납이 되질 않았다. 뜨거울 텐데. 아플 텐데. 그때 처음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 후 내 시간은 대체로 멈춘 듯하다.

8평짜리 주공아파트. 15층. 엘리베이터는 고장 나기 일쑤였고 계단엔 언제나 오물이 가득했다. 매일같이 1호부터 19호까지의 그 긴 복도를 걸으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함께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목욕탕에 자주 갔다. 늘 장을 보는 슈퍼의 바로 옆이다. 탈의실에서 옷을 홀딱 벗고 탕이 있는 곳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따뜻하고 뽀얀 김이 폴폴 났다. 내 키는 닿지도 않을 높이의 작은 창에서 빛이 스미고 그 빛에 뽀얀 김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면 내 마음도 몽글몽글.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새하얀 피부의 할머니는 모든 것이 하얗고 분홍분홍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분홍을 좋아한 것 같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분홍이니까, 분홍이라는 자체가 좋았다.

할머니가 가까워졌다.

"할머니, 여기서 뭐해? 여태 뭐했어? 뭐하고 지냈어? 밥은 먹었어? 청소는? 어디 살아? 누구랑 놀고 있었어? 제사 때는 항상 왔어?"

"아가. 나는 줄곳 여기서 지냈단다. 이승에는 한 번도 내려간 적이 없어. 그러면, 아마도 귀신이 될걸? 미련이 남아 귀신이 되어버릴 거야. 실제로 영혼은 산 사람의 세상에 갈 수 없고, 가는 법도 몰라. 뛰어내려 가겠니 날아 올라가겠니? 여기가 하늘보다 위인지 땅보다 아래 인지도 모르겠구나. 위치랄 것도 시간이랄 것도 없으니 내 기일이 언제인지, 살아있을 때 살던 집이 어디인지도 전혀 모른단다. 네가 보고 싶으면 가끔 꿈에 찾아갔지. 여전히 함께 시장을 돌아다니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국밥을 먹었단다. 그리곤 집에 돌아가 토닥토닥 재워주었지."

"아- 그거 진짜 할머니였구나. 내 상상 아니고 진짜 할머니. 그럼 이제 평생 같이 살 수 있는 거야?"

"글쎄. 그건 모르겠구나."


엄마 아빠가 보인다. 아닌데. 우리 엄마 아빠는 아직 안 죽었는데.

"여기 왜 있어?"

"보고 싶었어, 딸래미."

"엄마 아빠는 아직 안 죽었잖아?"

"엄마도 지금 막 죽었단다. 네가 죽고 30년 후에. 아빠는 재작년에 죽었고."

"그럼 내가 죽은 지 벌써 30년이 된 거야?"

"그런 것 같구나."

"나는 내가 방금 죽은 줄 알았는데. 여기 시간이 엄청 이상하게 흐르나 봐. 아, 참. 여기는 시간이 없다고 했어 할머니가. 그럼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렴 어떠니. 지금 이렇게 함께 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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