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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조 Sep 14. 2022

그 두 가지 권리만이라도

네. 제가 죽인 거 맞아요. 인생에 딱 두 명, 죽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기다리기만 하다간 제가 먼저 죽을 것 같아서 제 손으로 죽였어요.

살인에 대한 쾌감은 전혀 없었고, 안 그래도 피를 무서워해서 온 몸이 덜덜 떨렸어요. 지옥에 가겠죠. 하느님은 믿지도 않지만.


그 사람이 막내 삼촌. 아마도 저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 인간을 저주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주 어릴 때부터 성희롱을 많이 당했어요. 몸을 만지는 건 다반사고, 볼이며 손가락을 쪽쪽 빨기도 하고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요. 아무도 몰라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으니까. 그냥 다들 제가 죽도록 싫어한다는 것만 알아요.


할머니가 그 인간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그렇게도 평생 속을 썩이더니, 결국 그날도.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아파트 15층에서 술 심부름을 시켰거든요.

원래 그랬어요. 제가 보는 앞에서 만 원이 돈이냐며 갈기갈기 찢어발기기도 했고, 오디오로 찬송가 틀어놓고 술 심부름을 매일 시켰어요. 말이 됩니까? 우리 할머니 평생을 생선 장사하면서 고생만 했거든요. 비싼 거 먹는 꼴을 못 봤어요. 얼른 어른이 돼서, 돈 많이 벌어서, 우리 할머니 맨날 맛있는 거 사줘야지 그 생각만 했어요. 살기도 같이 살려고 했어요. 부모님도 친척들도 다 말렸지만, 왜 말렸는지도 모르겠지만 전 할머니랑 있을 때 제일 행복했거든요.


제 악의는 지금도 똑같아요. 그 인간이 죽었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할머니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제가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할머니를 위해 죽인 것도 아니에요. 할머니는 그래도, 자기한테 그렇게 나쁘게 했어도 자식이 살해당했다면 슬퍼하겠죠. 그건 미안해요 너무너무. 그래도 참을 수가 없었어요.

매일매일 하루라도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내가 감옥에 가든 사형을 당하든 정말이지 너무 죽이고 싶다, 그 생각뿐이었어요.


그 사람은 구남친. 만나는 동안 계속 죽고 싶었어요. 폭행과 욕설, 바람은 일도 아니었고, 꽤 긴 시간 동안 가스라이팅 당했어요. 정말 당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줄 몰라요.

말다툼을 하다 저를 때리면, "맞을 짓을 했지, 네년이. 더 맞아야 정신이 차리지 시발년." 매일 이렇게 듣다 보니까, 저도 저를 맞아도 싼 년, 정신머리 없는 년, 재수 없는 년으로 인식하게 됐어요. 고개를 들고 걸어 다니지도 못했고, 다들 나를 때릴 것 같고, 죽일 것 같고, 성폭행할 것 같았어요. 일하러 강남역에 갔다가 공황이 와서 쓰러진 적 있거든요? 그때 여러 사람들이 도와줬는데 당시에는 그것도 저를 납치하려는 건 줄 알았어요.


헤어지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저도 화도 내 보고, 울면서 제발 헤어져달라고 빌기도 했어요. 근데 그럴 때마다 죽도록 맞았고, 경찰에 신고를 해도 결국 둘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어요. 반팔을 입어서 멍이 다 보여도, 저 혼자 술 마시고 넘어졌거나 시비가 붙어서 그랬다고 본인이 더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어요. 아, 저 술 안 마셔요. 구남친은 매일 술을 마셨는데, 제 카드만 썼어요. 직업이 없었거든요. 부모님도 매일 술 마신다고 용돈도 별로 안 주고.

술 마시고 집에 들어가면 혼나니까 맨날 제 집에 왔는데, 싱크대에 오줌을 싸거나 자기가 사 온 아이스크림을 안 먹는다고 배를 발로 걷어차거나 생리통이 심해 앉지도 못하는데 침대를 차지해 한 겨울에 맨바닥에서 웅크리고 잔 적도 많아요.


그러다 진짜  마음먹고, 밖에서 헤어지자는 이야길 하고,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사 왔어요. 회사도 그만두고요, 번호도 바꿨어요. 그랬더니 메일을 엄청 보내더라고요. 물론 메일 주소도 바꿨죠. 그런데 어떻게 알아내는지 자꾸만 연락을 해대면서 제가 파혼을 했다느니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느니 말도  되는 소리를 했어요. 그러다 제발 돌아와 달라는 말로 마무리가 되고, 이게 무한 반복. 대응을 해도  해도 똑같았어요. 너무 지겨웠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냥 게임 캐릭터 지우듯이  세상에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죽였어요.


영화를 보다가요, 경찰이 살인자를 체포하면서 하는 말이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 진술을 거부할 권리'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거였어요. 저는 살면서  번도 어떤 권리를 가져본 적이 없거든요. 권리가 갖고 싶었어요.

이제 저도, 그 권리 생긴 거 맞아요? 저는 이제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도, 사형을 당해도 상관없어요. 이유야 어찌 됐든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게 맞죠. 그리고 저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 중, 아마도 가장 큰 죄를 지었으니까.. 변명할 여지가 없어요. 아저씨께는 정말 죄송해요. 아침부터 기분 안 좋으셨죠? 정말 정말로 죄송해요.


 ,  번만 저한테 해주실래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 진술을 거부할 권리... 그거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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