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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조 Oct 28. 2022

쥐가 되었다

오늘 아침, 나는 쥐가 되었다. 아니, 쥐가 되어 있었다. 어떤 벽도 뚫고 나와 모든 걸 갉아먹는 꼬리가 긴 회색 쥐. 하루라도 빨리 그의 내장과 눈알을 다 파먹어버릴 생각뿐이었다. 이유는 잊었다. 무엇 때문에 그에게 그토록 큰 상처를 받고 헤매었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달리고 달려 그의 집을 찾아냈다.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몹시 고팠다. 제일 먼저 부엌에 갔지만 먹을 수 있는 게 전혀 없었다. 쥐가 되어버린 나는 냉장고를 열 수도, 컵에 물을 따를 수도 없었다. 간신히 싱크대에 고여 있는 물을 조금 마셨다. 거실에 가보니 함께 자주 먹던 비스킷 부스러기가 있어 먹었는데, 왠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소파와 테이블을 군데군데 갉아먹고 맥주캔을 쓰러뜨렸다. 금잔화가 꽂힌 아름다운 자기 병도 있는 힘껏 쓰러뜨렸다. 소파 밑 콘센트에 꽂힌 전선도 갉아먹고, 벽지도 맘껏 뜯어내었다. 그리고 방으로 가 널브러진 옷들과 이불에 오줌을 샀다. 못된 짓을 할수록 나는 점점 더 화가 났다. 화가 풀리지 않고 점점 더 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마음조차 결국은 안중에도 없이 계속 계속, 점점 더 못된 짓을 했다. 그리고 화가 난 채로 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도르륵. 문 여는 소리에 잠이 깼다. 그가 온 것이다. 그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악랄한 냄새가 온 집안에 풍겼다.

생각났다. 그가 나의 목을 조르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그때 죽은 걸까? 기절한 걸까? 그 후의 일들은 생각나지 않고 쥐가 되어 깨어난 것만 생각난다. 그 앞의 일들은? 그와 내가 가족이었는지 친구였는지 연인이었는지, 잠깐씩 떠오르는 기억만으로는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그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온통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문틈에 숨어 그를 지켜보았다. 씻지도 않은 채 소파에 쓰러져 눕더니, 이내 냉장고로 가 비스킷 한 봉지와 맥주 두 캔을 가져와 무표정으로 벌컥벌컥 마셨다. 그의 이질적인 표정과 몸짓,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음식을 섭취하는 모습은 모두 소름 끼치고 천박했다.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당장 달려가 그를 뜯어먹기에는 그의 몸집이 나보다 몇십 배는 컸고, 살아 있는 인간을 먹는 것 자체도 처음이기 때문에 막상 실제로 닥쳐오니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숨을 죽이고 지켜보며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쥐가 된 후의 나는 왜 이리 느긋한 건지, 아차 하면 잠이 든다. 작은 불빛 하나 켜있지 않은 집이지만 나는 모든 게 다 보였다. 그는 잠이 든 것 같았다. 가까이 가보니 아까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풍겨왔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인상을 쓰고 자는 모습이 너무도 꼴 보기 싫었다. 갑자기 살해 욕구가 솟구쳐 앞뒤 생각하지 않고 제일 먼저 가슴을 뚫고 들어가 내 몸집보다 큰 심장을 먹었다. 비리고 질겨 구역질이 났다. 쥐도 구역질이 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단 한 번 움찔하지도 않았다.

그의 손가락을 먹을 땐 그가 나를 만지던 기억이 떠올랐다. 눈알을 먹을 땐 시선을 맞추던 때가, 입술과 혀를 먹을 땐 함께 먹던 음식과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 기억들은 그 기억이 있는 신체 부위를 먹을 땐 몹시 선명했지만, 다른 부위를 먹을 땐 아지랑이처럼 금세 사라져 버렸다. 심장을 먹을 땐 구역질이 나는 게 다였는데 다른 부분들을 먹을 땐 온갖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 신기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없애고 싶었던 작은 부분들만 먼저 골라 먹었는데도 나는 이미 배가 터져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긴 시간을 그를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마치 나는 그를 먹기 위해 태어난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 기분은 어느새 자부심이 되었다. 쥐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쥐가 된 게 자랑스러웠다. 정말이지 뿌듯했다.

'쥐는 정말 대단하네.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때, 최선을 다하잖아. 내가 사람이었다면 아마 이렇게까진 하지 못했을 거야.'

그렇게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끼며 눈앞에 남은 그의 몸에 집중했다.


그를 다 먹는 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주일, 열흘이 지났다. 나는 포동포동 살이 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맛이 없었다. 그저 먹어야 한다는 본능만으로 눈을 부릅뜨고 먹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는 악마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악마를 먹은 나도 이젠 악마가 되었을까.

배가 불러 뒹구는 와중에 그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흐려졌고, 조금씩 나에 대해서도 잊혀졌다. 내가 누구였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커녕 이름이 뭐였는지, 직업이 뭐였는지, 나이와 사는 곳도 잊었다. 머릿속에 공백만이 남은 나는, 그냥 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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