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 생명이란, 생명의 눈빛이란 나를 어쩔 도리가 없게 만든다. 아무리 짧은 순간을 함께 하더라도 내가 사는 내내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것이다.
키우는 강아지가 작년 9월에 새끼를 세 마리 낳았다. 사실 태아의 상태가 걱정이었다. 동물병원의 오진으로 약을 잘못 처방받았는데, 그 약이 기형을 유발하는 약이었다. 그래도, 다리가 세 개든 다섯 개든, 눈이 안 보이든 언청이든 제발 건강하게만 태어나주길 기도했다. 하지만 첫째 말고는 몸이 아주 약했다.
둘째는 이틀 만에 죽었다. 내가 탯줄에 실을 감기 전에 엄마 강아지가 조금 과격하게 탯줄을 끊어 피가 팡 터졌었는데 뭔가 감염이라도 된 걸까. 그래도 품에 잘 파고들길래 안심하고 나름 잘 돌보겠다고 방도 아주 뜨끈하게 해 놨었는데 아침에 보니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때 잠을 자버린 나를 굉장히 원망했다. 안 자고 계속 돌봤으면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막내는 태어나자마자 숨을 안 쉬었는데 인공호흡도 계속하고 수건과 드라이기로 한참을 따뜻하게 만져주니 간신히 숨을 쉬었다. 하지만 젖을 전혀 빨지 못해 분유를 사다 먹였고, 젖병도 빨 줄 몰라서 한 방울씩 떨어뜨려 먹여야 했다. 그조차도 계속 코로 나오고 먹는 양도 적어서 한 시간, 두 시간에 한 번씩 먹이느라 몇 주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방도 뜨거워 땀을 뻘뻘 흘렸다. 그래도 엄마 강아지보다 내 얼굴에 온몸을 맞대고 자는 걸 보며 사랑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도 젖을 빠는 힘이 전혀 없었고 갈수록 점점 더 먹질 못하고 하루 종일 배가 고프다고 울던 아이가 언제부턴가 젖을 물려줘도 아예 빨 생각도 안 했다. 먹으면 먹을수록 아팠다. 아픈 게 눈에 보였다. 갑자기 고개가 휙 젖혀질 정도로 몸에 힘이 빠졌다. 대소변도 쉽지 않았고 소변에선 첫째와 다른 묘한 냄새가 났다. 너무 걱정이 되어 병원에 몇 번 갔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그리고 죽던 날, 죽기 몇 시간 전에 간 병원에서 "자연의 순리대로 되는 거죠, 뭐."라는 무심한 말을 들었다. 따뜻하게 해 주려고 보온팩에 후리스까지 해서 갔는데 에어컨 빵빵한 추운 진료실에, 차디찬 테이블에 안 그래도 아픈 아이를 그대로 올려놓고. 내 손이 닿아있다 떨어질 때마다 서럽게 울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무서웠던 것이다. 아직 사는 게 뭔지도, 죽는 게 뭔지도 모르는 아가지만 본능적으로 무서웠던 것이다. 그렇게 3주를 간신히 살아내고 떠났다.
눈을 뜨기도 전에 안에서부터 고름이 생겨 첫째보다 눈도 훨씬 늦게 떴다. 그 눈으로 매일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내가 잠깐이라도 없으면 목청이 터져라 울었다. 나만 찾아서 일을 하러 갈 때도 곱게 싸매고 데리고 다니며 세 시간마다 젖병을 물렸다.
아가들이 죽은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슬픔과 분노와 허무함이. 내 인생에 더이상 동물을 키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