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이 되려 애쓰지 않기로 했다
꼭 좋은 사람이어야 할까요?
이 질문을 하기 전에, ‘그럼 좋은 사람이란 뭔데요?’라는 물음을 던지고 싶다. 정작 좋은 사람의 정의를 명확히 내리지 못하면서 우리는 모두 이유 불문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우습게도 나도 스스로 나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타인에게 좋은 시선을 얻고자 꾸준히 노력했다. 특히 나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에 맞추어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나를 ‘가식적’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뭐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 가식 안 떠는 사람들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누구나 모두 페르소나라는 가면을 쓴 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상황과 때에 따라 다른 가면으로 바꾸어 나를 선의로 포장하는 것도 가끔은 필요하다. 그렇다고 ‘나’라는 사람이 갑자기 ‘너’가 되는 것도 아닌데.
페르소나 없이 나의 내면을 그대로 들춰내면 우리는 절대 사회에 적응할 수가 없다. 이게 때로는 가식이 필요한 이유이다. 직장에서 부장이 할 일을 산더미처럼 준다고 해서 속에 담고 있는 마구잡이의 거친 언어들을 쏟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때는 나를 빠르게 다른 가면으로 전환하여 내면의 모습을 감추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우리가 같은 공간 안에서 마주하며 살아가는 한 서로에게 생채기 하나 없이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며, 나 또한 상대방의 미간에 주름이 잡힐 만한 행동을 서슴없이 했을지도 모른다. 좋은 의도에서 했던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비수를 꽂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고, 또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의 입에 의해 나는 한순간에 개새끼가 될 수도 있다. 아니 이미 누군가에게 나는 ‘저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하는 나쁜 사람 기준의 이정표가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인간은 너무 단순하고 때로는 간사해서 그 사람의 외형적인 스타일이나 말투를 보며 ‘별로야’라고 치부해버리지만, 또 이 사람이 자신에게 이로운 일을 하게 된다면 ‘좋은 사람’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아무리 어떤 한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해도, 뒤에서는 나를 무시하면서 정작 앞에서는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이라는 당근을 주며 이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이 그냥 한순간에 바보가 되어버리는 이런 상황을 보면, 어떤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가는지 서로를 완벽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가끔은 사람에게 회의감이 들 때도 많다. 그런 점에서 나도 나를 가식적으로 말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서두에서 밝힌 질문에도 명확히 대답할 수 있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개개인의 기준에 의해 판단되고 마는 것인데, ‘꼭 좋은 사람이어야 할까요?’
아니요!
세상에 좋은 사람이란 없다. 그저 자기 기준에 맞추어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된다면 그냥 나와 잘 맞는 사람이거나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면, 내 주변에는 나와 함께 나란히 하고자 하는 이들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너무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기로 했다. 흘러가는 대로,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이들에게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