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 ‘나’가 우리가 되기까지
우리는 타인을 배제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타인이 있어야 ‘나’라는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나’와 타인의 차이를 인식하면서 자신만의 개성과 정체성을 찾아 나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울타리 안에 얽혀 살아가는 ‘나’는 타인과의 무수한 차이 속에서도 교집합을 찾아 서로의 세계를 공유하며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러한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단어에도 차이가 있는데, 서로가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가 저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에는 그것이 크든 작든 간극이 없는 것은 없다. ‘나’라는 인간은 타인과 인연을 맺기 위해 차이를 느끼면서 갈등을 겪고 이별을 마주하기도 한다. 또 교집합을 넘어 타인의 세계에도 발을 들여놓고 싶다는 욕구의 이면에는 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감’이라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
우연히 만나 서로를 사랑하게 된 연인이 있었다. 그들의 우연한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불처럼 더욱더 뜨겁게 타올랐다. 사소한 일로 소리 지르며 싸우다가도 그들의 사랑은 언제든 다시 뜨겁게 피어올랐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여자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고, 반면 남자는 가난한 목수 집안의 아들이라는 신분 차이가 극명했다. 여자의 가족과 남자의 식사 자리가 마련된 날, 남자는 그들의 대화에 낄 틈을 발견할 수 없었다. 여자의 가족과 자신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간극에 남자는 왠지 모를 당혹스러움까지 느꼈다. 여자와 남자는 불같은 사랑을 했지만, 보이지 않는 틈으로 새어 나오는 냉랭한 기운에 사랑의 불길은 어느새 휘청거렸다. 여자는 떠나야 했고, 결국 그들은 헤어졌다.
이 여자와 남자 이야기는 바로 ‘앨리’와 ‘노아’, 영화 <노트북>의 주인공이며 영화 내용의 일부이다. 이 영화는 살아온 환경도, 성격도 너무나 다른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그로 인해 갈등을 빚고 차이 때문에 결국 이별을 마주했던 절절한 그들의 사랑 이야기이다. 특히 앨리의 부모는 앨리와 노아의 사랑을 강력히 반대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른 그들의 사랑이 어울리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앨리는 이 시련을 노아와 함께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그들이 쉽게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앨리와 노아의 이별 후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야속하게 어긋난 시간들은 그들의 사랑으로 다시 끼워 맞춰진다. 신문에 실린 노아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앨리는 무작정 노아의 집으로 찾아갔다. 다시 만나게 된 그들은 과거에도 그랬듯 또다시 치고받고 싸우기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불같던 사랑은 외부에 의해 단순히 휘청거렸을 뿐, 쉽게 꺼지진 않았다. 긴 시간의 사이에서도 남아있던 불씨는 다시금 타올랐다. 노아와 앨리는 공감하고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서로를 다시 마주하고 마침내 사랑으로 감싼 것이다.
앨리와 노아의 사랑에서 보았듯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감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나’와 그리고 ‘나’와는 너무나 다른 타인들과 공존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숙고해야 할 아주 깊은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타인들이 ‘나’의 말에 손을 들어줘야 그것이 진정한 공감일까?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을 할 때야 비로소 진정한 이해와 공감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아도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밀어 주는 손이야 말로 진정한 공감이다.
연인의 사랑 말고도, 가족과 친구 간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똑같이 배 아파 낳은 자식이지만 가끔 자식들은 부모에게 차별받는다고 느낀다. 형(오빠)이라서 혹은 언니(누나)라서 동생을 돌봐야 하고, 양보를 해야 하고, 동생이라서 더 형(오빠), 언니(누나)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익히 부모님에게 자주 들어본 말이다. 근데 여기서 누가 맞고 아니라는 사실을 따지기보다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서로에 대한 배려와 공감이다. 그 이유는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너무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차이 때문에 공감하지 못해서 갈등을 겪는 것이 아니라 앨리와 노아의 어긋났던 시간처럼 우리는 단지 다시 끼워 맞춰야 할 시간들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나의 어렸을 적 친했던 친구들과도 시간이 지나자 데면데면해지고 어색한 사이가 되거나 사소한 오해로 사이가 틀어진 적도 있었다. 자주 연락하던 친구들이 사라지니 마음의 서랍이 빈 것처럼 허전하기도 했다. 각자의 일상과 생활이 바쁜 탓에 오해와 핑계가 쌓이고 쌓인 결과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서로의 일상을 공감해줄 능력이 부족했던 탓이다. 앨리와 노아가 시간을 가지고 멀리서 서로를 생각했던 것처럼 나에게도 사실은 어긋난 것들을 다시 끼워 맞출 시간과 마주하고 대화해야 할 순간이 필요한 걸 수도 있다. 다른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과 시간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것 같다. 단지 서로에 대한 공감이 부족해서 말이다. 그렇게 틀어진 나와 친구는 함께 쌓아왔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마음에 남아 그 시간들을 그리워할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참 어렵다. 관계는 공감으로 형성되는 것인데, 자신이 생각하는 공감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때로는 서로에게 내쳐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해 온 시간이 무색하게도 지나고 보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다. 조금만 더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만, 또 극복하지 못하고 어긋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 관계에 상처 받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한 걸음마 단계이지만, 이런 서툰 과정들이 분명 더 좋은 인연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과 나가 ‘우리’가 되기까지는 짧을 수도, 혹은 다양한 갈등을 겪으면서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 시간은 얼마나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공감하는지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된다. 서로의 삶에 공감했을 때 타인과 나는 ‘우리’가 된다. 또 우리가 시간을 함께 나란히 걷는다는 것은 추억을 쌓는 일이다. 또, 타인과 마주하는 우리의 삶은 수많은 공감을 겪는 일이다. 그렇다. 사랑을 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지속적이고 진정한 공감’을 한다. 그리고 공감을 할 때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한다.
그래, 사랑을 할 때야 비로소, ‘우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