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한 칸 정도는 비워도 괜찮을까요?
마음에는 형태가 없어서 가끔 못 보고 지나칠 때도, 어떨 때는 내 의지와는 다르게 너무 쉽게 다른 사람의 마음에 흘러 들어갈 때도 있다. 또 이리저리 치인 마음의 형태가 마모되어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 쓸 공간조차 없을 수도 있다. 그 모양이라도 꺼내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이의 마음의 형태를 먼저 볼 수 있게 된다면 다가가던 발걸음을 잠깐 무를 수도,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을 텐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서로의 마음은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 가늠할 수도 없고, 어떤 약을 처방해줄 수도 없기에 아무는 데까지 시간도 꽤나 걸린다.
그래서 직접적인 소통이 우리에게는 필수적이다. 이 마음과 마음의 교류가 없다 보면 서로에게 상처를 내다 못해 그것은 상흔으로 남을 수도 있다. 그 상흔을 볼 때마다 그때의 아픈 기억들이 재생된다면 이미 지울 수 없는 흠을 하나 얻은 것이다. 나도 이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도 몰랐던 부분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또 물론 나에게도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흔이 마음에 깊이 남아 있는 것들도 있다. 그런데 마음은 자가 치유가 어려워, 살아가면서 내 한 몸 지키다 보면 서로에게 일말의 상처 하나 주지 않는 것이 더 힘들다. 지금도 계속해서 불가시적인 상처를 누군가에게 주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을 갈구하고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인간들이지만, 너무나 나약하고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가끔 크게 와닿게 되는 날이 있다. 털어놓고 싶은 무거운 마음이 있어도 그 마음을 붙들고 누구에게도 말하기를 망설인다. 아무래도 관계는 쉽게 망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평생을 약속했던 사이라도 언젠가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하고, 안부를 주고받던 사이가 안부를 묻기조차 꺼려지는 사이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누군가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는 게 무상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느껴서 그렇다. 그때 마음의 형태를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그 마음을 보고 먼저 손을 내밀어줄 수도, 어루만져줄 수도 있는데, 그러지 못해 마음이 천근이고 만근이 될 때까지 스스로조차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나 역시 언제부턴가 나의 상처를 덜어내는 일이 누군가에게 피곤함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의 투정은 그저 핑계와 어리광에 불과하다고 취급하며 내 마음의 신호조차 무시한 채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게 된 것 같다. 또 나 하나 건사하기 힘든 세상 속에서 어느 샌가부터 다른 이의 아픔에도 무뎌졌다. 외로운 존재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살아갈 생각은 않고, 내가 이기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용기 내어 조심히 마음을 꺼내면 주고받는 대화 속에는 언젠가 허공에 흩날려갈 말들이라도 그때 그 순간만큼은 따뜻해지는 단어들이 주변을 감싸고 맴돌게 된다. 그 온기는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나아갈 힘을 주었다. 그래서 무작정 마음의 문을 닫기보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는 존재들이라, 상처가 상흔이 되기 전에 채우기도 하고 다시 비우기도 하는 것이 외로운 우리들이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갈 방법인 것 같다. 그래서 한 칸 정도는 여유분으로 만들어 놓고 아팠던 상처를 꺼내어 나약한 서로에게 든든한 마음의 형태가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