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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공일북클럽 Aug 17. 2016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니

남한강 견지낚시통신

“엄마,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니, 뭐가 흐르는 강물같다는 거야”


이렇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큰딸아이와 나는 그때,

그 아이가 만 두 살이던 1995년부터 여름마다 어설픈 캠핑도구를 주섬주섬 챙겨넣고, 잠든 두 아이들을 담요로 감싸 안아 차에 뉜 채 새벽길을 달려오곤 하던 충북 단양, 남한강 상류에 몸을 담그고 있는 중이었다.

1994년 여름,60년만의 기록적인 폭염이후 다시 22년만에 나라 전체가 불가마속에 던져진 듯한 2016년 현재진행형인 폭염은 너무 차가워서 살짝 발만 담그곤 했던 이 곳 남한강물도

여유있게 유영을 즐길 만큼 딱 알맞은 온도로 데워 놓았다.


우리 네식구가 22년째 그토록 사랑하는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은, 견지낚시꾼들 사이에선 유명한 포인트이지만 캠핑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돌밭인 탓에 늘 한적해서 더 좋다.

도로변 펜션 주차장부터 남편은 텐트를 비롯한 캠핑도구와 낚시장비들을 이고지고, 나는 작은 아이를 업고 큰아이는 안고서 키만큼 자란 풀숲을 헤치고, 크고 작은 돌덩이들로 가득한 강변을 위태롭게 걸어 들어가곤 했다. 

남편이 서둘러 돌을 골라내고 텐트를 치는 동안, 나는 그제야 잠에서 깬 두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며 우유병을 물렸다. 우리들의 쉼터가 다 만들어지면 그이는 구더기통을 목에 걸고(우리 아이들은 견지낚시의 미끼인 구더기를 낚시를 통해서만 봤기에 귀엽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어망은 허리에 두르고, 파리채처럼 생긴 낚싯대는 셔츠속 등에 꽂은 채 강물로 달려간다.(새벽에 낚시가 잘된다)

난 아이들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살피며 아이스박스에서 캔커피를 하나 꺼내 한모금 들이키며 비로소 풍경을 천천히 눈에 담는다.

쉼없이 흐르는 강물, 그 뒤로 병풍처럼 둘러져있는 낮은 산, 능선엔 아직 운무가 걸려있고, 그 위로 파란 하늘이 있다. 다시 시선을 낮추면 낚싯줄을 물살의 흐름에 맞추어 풀었다 당겼다를 반복하는 남편의 모습이, 그리고 내 주위에서 꼬물대며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남편의 곁에서 큰애의 남자친구가  리듬을 맞추듯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물살의 간지러움을 기분좋게 느끼고 있다.

“엄마, 뭐가 흐르는 강물같냐구요”

성미가 급한 아이가 재차 묻는다.

아, 그러니까 그건 사실 영화 제목인데...


큰애를 낳은 해에 개봉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로버트 레드포드감독, 브래드 피트주연,조셉 고든 래빗도 아역으로 등장하는) 영화도 좋지만 그보다 미국 몬태나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주인공이 멋지게 플라잉 낚싯대를 휘두르는 포스터가 더 유명해진 영화랄까. 이후로 십여 년 이상 어느 곳을 가든 심심치 않게 그 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 마치 내 어릴 적 어느 가게를 가든 밀레의 ‘만종’의 그림이 걸려있었던 것처럼.

견지낚시의 대가였던 사촌 시누이 남편의 소개로 단양을 찾았을 때, 우리와 비슷한 나이의 젊은 부부가 역시 우리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남매를 데리고 이곳의 유일한 민박집을 막 개업한 상태였다. 민박집이름은 당시 가장 트렌디한(?) ‘흐르는 강물처럼’이었고. 이후 우리는 우리만의 이곳을 ‘흐강’이라고 줄곧 불러왔다.(주인부부도 변함없이 그대로다)

영화 속 홈스쿨링을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목사인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작문을 시키는데 계속 더 줄이기,줄이기를 반복시키다가, 흡족해지면 그 완성된 원고를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후, 세 부자는 함께 낚시를 하러간다. 이후 두형제는 똑같은 플라잉낚시래도 각자의 낚시스타일이 달랐던 것처럼, 질서에 순응하고 책임감이 강한 큰아들은 안정된 교수의 삶을, 자유분방한 둘째아들은 기자가 되지만 어쩌다 도박에 빠져들게 되고 결국 사건에 휘말려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판이한 삶을 살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홀로 어릴 적  장소에서 낚시를 하는 중년의 큰 아들은 그 ‘흐르는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우며 어떤 회한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몇 번이고 힘들게 고치곤 했던 원고를 한치의 아쉬움없이 찢어버렸던 것처럼, 흐르는 강물속에 우리의 시간도 그렇게 흘려보낼 수 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건 낚싯대를 드리우던 그 찰나의 기쁨을 함께 한 기억정도라는 것. 아니면, 그렇게 완벽한 순간을 함께 했어도 정작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순간에 서로를 도울 수 없다는 절망이었을까.

아름다운 풍경 속 그의 마음을 난 그저 짐작할 뿐이다.


이곳, 단양의 ‘흐르는 강물처럼’도 변함없이 세차게 흘러간다.

이십여 년의 시간도 그 속에서 흘러가버렸고...난 마음속으로 아이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더 이상 우리와 시간을 나누려고도 추억을 만들려고도 하지 않지. 그 나이의 우리가 우리의 부모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강물처럼 너희는 우리에게서 그렇게 멀어져가는 구나.

자고 있는 너희를 냉큼 들어 올려 품에 안고 올 수도 없고, 아빠가 커다란 돌로 정성껏 쌓아 안전하게 만들어준 강가 연못도 더 이상 의미가 없지. 우리의 모순과 무능력을 들켜버린 이젠, 너희들이 우리보다 조금은 더 나은 선택을 하길 바라며 그저 바라볼 수 밖에.

거친 돌밭 위, 우리의 발걸음은 더 위태로워졌지만, 성큼 앞질러가는 너희의 발걸음에 안도한다.


"완벽한 이해없이도 우리는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다"


라고 영화 속 두아들의 아버지가 작은 아들의 장례식에서 말했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때론 더 큰 좌절을 불러오기도 해.

인간은 결국 자기 관점을 절대 벗어날 순 없잖아.

너희들이 성인이 되면서 그런 노력들이 헛될 뿐이라는 허무감에 종종 빠지기도 하지.

다만 우리가 22년간 함께하며 마음속에 새긴 <흐강>에서의 추억을 가끔 꺼내어 미소 지을 수 있길 바랄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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