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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Aug 02. 2023

그리움으로 스며드는 맛, 산자

산자는 서산의 명물이며 그리움이다

   명절을 앞둔 요즘, 각 지역마다 특산물 홍보에 불이 난다. 며칠 전, 우연히 충청도 예산의 한과를 알리는 광고지를 보게 되었다. 표지 모델은 양손에 한과를 들고 얼굴 가득 웃음 짓고 있는 할머니들이다. 순박한 마음들이 모여 손으로 정성껏 빚어 만든 전통과자를 사진으로 대하니 절로 고향 생각이 났다.


나는 충청도 서산,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예산과 이웃인 내 고향에서는 한과를 '산자'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른다. 산자는 집안의 대소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음식이다. 잔치가 코앞으로 다가오면 집집마다 산자 만들 준비가 한창이다. 초가집 굴뚝마다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달달한 냄새는 온 동네를 휘감아 돈다. 잔칫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신바람 난 아이들과 함께 들판을 쏘다니곤 했다.


한과는 '산자'와 '강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잘 부서지는 게 특징이며 재료가 비슷하다. 강정은 손가락 굵기의 막대 모양이 많고, 산자는 네모반듯하다. 입안에 들어가면 사르르 녹을 정도로 부드러운데 식감에 약간 차이가 있다. 강정은 맛을 느껴보기도 전에 금방 녹아버린다. 그에 비해 도톰한 산자는 단맛이 쉬이 달아나지 않고 잠시 입안에서 머무는 여유가 있다. 쌀로 튀긴 튀밥의 구수한 맛이 여운을 남기는 것도 독특하다. 씹을 때마다 들리는 '바사삭' 소리는 덤으로 재미를 얹어준다.


산자는 갑작스레 만들 수 있는 인스턴트식품이 아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해 낼 수 없고,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야만 한다. 만드는 과정 상 준비 기간도 상당히 길어 빈틈없이 계획을 세워야 한다. 가족들이 한날한시에 모여 한마음으로 뭉쳐야만 비로소 탄생되는 음식이다.


외할머니는 거의 보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준비를 시작했다. 산자에 빠져서는 안 될 강냉이 튀겨주는 아저씨가 동네에 슬슬 나타날 무렵이다. '뻥'소리와 함께 흰쌀을 튀밥으로 변신시켜 주는 아저씨는 가는 곳마다 인기다. 마당에 걸린 가마솥에 고구마와 엿기름을 넣고 종일토록 불을 때서 조청을 만들어 둔다. 절구에 빻은 찹쌀가루는 부드럽게 반죽하여 국수 만들 때처럼 방망이로 얇게 민다. 그것을 작은 네모 모양으로 잘라 방바닥에 펼쳐두고 며칠 동안 딱딱하게 굳힌다.


산자 만드는 날은 아침부터 요란하다. 우선 딱딱하게 굳은 찹쌀과자를 튀겨내야 한다. 기름에 들어가자마자 지지직거리며 사방으로 뻗히기 때문에 노련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양손으로 숟가락을 잡고 재빨리 움직여 반듯한 모양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솜씨 좋은 외숙모 차지가 된다. 다음으로는 노릇하게 부풀어 오른 과자에 조청을 입히는 일이다. 자칫하면 으깨지기 때문에 경험이 풍부한 할머니 손이 제격이다. 평소에는 집안일에 뒷전이던 나도 이 날만큼은 도움 주는 사람으로 끼게 되어 뿌듯하다.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린다. 잘할 수 있을지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튀밥이 담긴 커다란 광주리를 앞에 두고 내 역할이 주어지기를 기다린다. 드디어 엿물을 입은 튀김이 한 바퀴 공중회전을 마치고 광주리 속으로 툭 떨어진다. 나는 재빨리 광주리를 앞뒤고 흔든다. 잠시라도 한눈팔 겨를이 없다. 엿이 굳기 전에 튀밥 옷을 고루 묻혀야 예쁜 산자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손놀림이 조금이라도 서툴다 싶으면 일감을 빼앗길 수도 있기 때문에 진땀이 나도록 흔들어댄다.

  "와! 우리 손녀딸도 제대로 한몫을 하네."


칭찬을 들으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팔놀림은 더욱 빨라진다. 깔깔대며 쏟아지는 이야기는 귀에 주워 담고, 깨진 산자는 연신 입으로 집어넣는다. 창호지 문틈으로 들어오는 한기가 어느새 훈훈한 열기로 바뀌어 양볼을 빨갛게 물들인다. 마당에는 소리 없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방안의 소쿠리에는 하얀 산자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이 산자 맛 좀 보렴."

  할머니는 네모반듯하게 잘생긴 산자를 입에 물려주며 등을 쓸어준다.

  

광고지를 보자 언뜻 이번 설 선물은 산자가 안성맞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들에게 나의 유년시절 이야기도 넌지시 함께 건네주고 싶어서다. 고향 가는 길에 산자 만드는 곳을 들르기로 했다. 산자 원산지로 잘 알려진 곳이었으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조금 떨어진 다른 곳으로 가려고 발길을 돌려봤으나 '호두과자'라는 낯선 간판만 붙어 있었다.

다시 인터넷을 한참 뒤진 끝에야 산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 농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파란 지붕을 머리에 인 아담한 양옥집에 붙은 간판이 멀리에서도 눈에 띄었다. 빨간색으로 쓰인 '서산 생강 산자'라는 상호가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안내받은 곳에 들어서니 선물용 상자가 방안에 그득했다. 위생모를 쓴 분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담소하는 중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인상 좋은 할머니가 산자하나를 내밀었다.

  "새악시, 이 산자 맛 좀 보슈."

  외할머니처럼 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다. 어서 먹어보라는 손짓에 받아서 한 입 깨물었다. 바사삭 소리와 함께 달착지근한 맛이 봄눈 녹듯 사르르 녹아들었다.

  언제나 그리움으로 스며드는 고향의 맛, 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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