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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Sep 19. 2023

홍시, 주홍빛 그리움

봇물 터지듯 그리움이 인다

     

남편이 퇴근길에 잘 익은 홍시 한 봉지를 사 왔다. 반듯하게 생긴 둥그런 모양의 홍시는 말랑말랑 감촉도 좋다. 주홍빛 말간 홍시를 한참 들여다보려니 어릴 적 뛰놀던 고향 마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뭉게구름 사이로 고개 내민 고향 하늘은 해맑은 아가 얼굴처럼 고왔다. 수호신처럼 서서 늘 고향을 지켜 주던 늙은 감나무가 집 옆에 서 있다. 휘어진 허리마다 축축 늘어진 가지에 빼곡하게 달려있던 그 홍시가 바로 이 주홍빛이었다.


외할머니는 해마다 감을 따면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아 두었고, 더러는 껍질을 벗기고 긴 꼬챙이에 꿰어 추녀 밑에 걸어 두었다. 광 문을 열 때마다 항아리에서 풍겨 나오는 감의 향내는 한겨울이 지날 때까지 온 집안을 휘감았다. 눈 오는 밤, 차디찬 홍시를 한 입 베어 물을 때마다 입안 가득 싸늘하게 퍼져오던 그 단맛이 아직도 생생하다.


감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건만 외할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아흔이 넘어서도 외손녀를 업고 시장 한 바퀴를 휑하고 다녀올 정도로 건강했던 분이었는데.


유달리 외할머니의 정을 듬뿍 받고 자란 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할머니의 노환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몇 달 사이에 살가죽이 늘어지고 뼈마디가 손에 잡힐 정도여서 한 발짝을 떼지 못하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목에 걸린 숨조차 그렁그렁 쇳소리를 내어 금방이라도 멈춰버릴 것만 같아 발만 동동 굴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물기가 말라 오그라든 입술 위로 물 한 방울을 똑똑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그 작은 물방울도 넘기지 못해 용을 쓰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퀭하니 들어간 할머니의 눈을 들여다보던 엄마는 낙담하며 힘없이 말했다.


“고목에 물 줘야 살아나겠나.”


그때의 엄마 심정이 얼마나 쓰리고 애통했을까. 곡기를 완전히 끊고 물로만 연명하던 며칠째, 갑자기 애절한 눈빛으로 딸기를 찾는 순간이 있었다. 회생의 기미인가 싶어 반가움에 백방으로 딸기를 구하려 다녀봤지만 헛수고였다. 추운 겨울에도 흔하게 먹을 수 있던 딸기가 오히려 가을에는 구경조차 할 수가 없다니.


다음 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외삼촌 댁 마당을 뒤졌더니 낙엽 깔린 잔디밭에서 말라빠진 딸기 여섯 알을 발견한 것이다. 비록 내 손으로 구한 것은 아니었으나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여러 날을 물로만 연명하던 분이 그 오죽잖은 딸기를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모두 잡수셨다.


하지만 회생의 기미는 없었다. 몇 번인가 토할 듯 삼킬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순간, 갑자기 주위가 술렁대기 시작했다. 사그라들기 바로 직전에 가장 밝게 빛난다는 촛불처럼 잠시 반짝 기운을 차렸던 할머니는 끝내 소천하셨다. 딸기는 달게 드셨으나 스르르 영면에 들어가 눈꺼풀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할머니를 부르며 오열하는 내게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할머니 몸에 절대 눈물 떨어뜨리지 마라!”


청아한 목탁 소리와 함께 스님의 반야심경 속으로 조용히 빨려 들어가던 할머니를 부르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을 수없이 읊조렸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 아흔이 넘도록 왕래가 끊겼던 친정 동기간이 제일 보고 싶다던 임종 시의 말씀이 오래도록 귓가에 윙윙거렸다.


염을 잡수실 때의 뽀얀 얼굴은 마치 분 바른 새색시처럼 빼어난 용모를 대변했다. 참빗으로 곱게 빗어 쪽을 지고 비녀를 꽂던 단정한 머리는 여했다. 언젠가 보았던 흑백 사진 속의 무명치마저고리를 입은 어린 소녀가 되살아난 듯 맑은 빛 뿜었다. 죽음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아 베 버선으로 싸맨 발끝 살며시 손 대보니 역시나 싸늘했다.


시집와 평생을 바친 고향의 뒷산으로 꽃상여가 올라가던 날, 이름 모를 산새들의 날갯짓을 따르는 상두꾼의 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어야 어어야 아...”

“모진 풍파 잊고 가세. 어어야 어어야 아... ”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난 코스모스가 소리 장단에 맞춰 한들거렸다. 좁디좁은 관에 서 나온 할머니가 붉은 휘장 두르고 땅속으로 옮겨질 때는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정신을 차려 사방을 둘러보니 뒤로는 소나무 숲이 울창했고, 산 앞으로는 실개천이 졸졸거렸다. 발끝에 채는 잔잔한 풀꽃과 풀숲을 헤치며 울어대는 벌레들. 드넓게 펼쳐진 하늘은 이 모든 것들을 포용하며 따사로운 햇살을 마구 쏟아냈다. 자연은 길고 긴 여행길에서 돌아온 사람을 감싸 안으며 너그럽게 품어줄 준비를 마친 듯했다.

  

산 아래 잘 뚫린 길로 차가 지나다니고, 도란거리는 사람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살아생전 추억이라도 가끔 떠올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마음 한편이 든든해졌다.

  

할머니와 헤어지던 그 가을이 바로 엊그제 같기만 한데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나 보다. 말랑거리는 홍시를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본다. 할머니의 손길이 아이들 얼굴에, 눈동자에 진하게 배어다. 땀띠 마를 새 없이 나를 업어 키우던 사랑을 내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나눠주고 가셨다. 맛나게 먹고 있는 아이를 보다가, 주홍빛 물이 뚝뚝 떨어지는 홍시를 번갈아 바라다.

'할머니 계신 곳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왔을 텐데, 맛이라도 한 번 보셨을까.'


지금쯤 할머니 곁에는 벌레들 노래 연주에 맞추어 풀꽃들이 한들한들 춤을 추겠지. 새들이 놀러 와 먼 세상 이야기도 들려줄 테니 많이 외롭지는 않을 거야.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해도 든든한 소나무가 지켜 줄 테고, 푸른 하늘이 언제나 지켜보고 있으니 편안하실 거야.


남편이 내민 홍시 하나 받아 들고는 결국 목이 메어 차마 먹지 못한다. 지금쯤 할머니는 또 다른 세상에서 사귄 동무들과 잘 지내고 계시련만. 한번 맺은 인연을 끊지 못하는 나는 봇물 터지듯 그리움을 왈칵 쏟아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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