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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Feb 05. 2023

이별의 정표, 눈물 한 방울

안녕, 나의 첫사랑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봐."

 

 오랜 망설임 끝에 내뱉은 말이다. 아무런 대꾸가 없다. 안타까움에 목이 메인 건지, 목구멍까지 원망이 차오른 건지는 잘 모르겠다. 보고 싶어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시려왔을 뿐. 이별 통보가 이토록 커다란 짐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은 했으나 막상 눈앞으로 닥치니 예삿일이 아니다.


  그를 처음 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구석진 자리에서 점잖게 나를 응시하던 그는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덩치가 크고 훤칠한 이들에 비해 눈길을 끌 만한 매력은 당연히 부족했다. 하지만 특별한 호기심도 없던 그와 인연을 맺고 여러 해를 함께 하고 있으니 묘한 이다.

  오랜 시간을 토닥토닥 의지하다보니 깊은 정이 쌓였다. 눈빛으로도 교감할 정도로 서로에게 잘 길들여져 있던 우리.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숱한 추억들이 서로의 가슴에 오롯이 새겨졌다.  

  

  정식으로 그를 만나던 날은 서먹하여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다. 입안이 타들어 갈 듯한 긴장으로 어깨에 힘만 잔뜩 주어졌다. 행동은 잽싸지 못해 굼떴으며 눈동자는 잔뜩 주눅이 들어 좌우 눈치만 살폈다. 촌스럽게 사시나무 떨 듯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돌발 사고라도 날까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더니 등줄기엔 진땀이 흘렀다. 이런 나의 미숙함엔 아랑곳없이 그는 묵묵하게 가야 할 길로 나아갔다. 올곧은 그의 모습에 희열을 느꼈지만 아슬아슬하고 두렵기만 하던 첫날이었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어색한 거리감은 자연스레 희석되었다. 한 치의 여유 없이 돌아가는 일상에 지쳐있던 내게 그는 활력 그 자체가 되었다. 옆구리에 바짝 붙어 다니는 친구처럼 먼 길에 손을 내밀었고, 좁은 시야에서 맴돌던 나를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초행길이 두려워 한참을 머뭇거리면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덕분에 나의 부푼 자신감은 하늘을 향했다.  직장 다니면서 아이들 챙기랴 시간에 쫓겨 늘 쉼에 목말랐던 나. 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바짝 시들어버렸을지 모른다.


  그뿐인가. 힘든 일이 생기면 함께 한강으로 달려나가 강바람에 하소연했다. 태양이 그리다 두고 간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한아름 웃음짓던 그날을 어찌 잊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     부르던 그 노래를 어찌 묻어버릴 수 있을까.  


  이제 와 고백하건대, 참으로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이 있다. 그보다 잘 생기고 기품 있는 이에게 나도 모르게 넋이 빠졌었다. 그와 동행하면서도 다른 이에게 흘끔흘끔 눈길을 주기도 했다. 섣부른 선택을 후회하며 변덕을 부릴 때면 이기적이고 간사한 나를 찍어 눌러야 했다.

 

  ‘겁 많은 너한테는 작은 체구인 그가 천생연분이야.’


  한동안 주춤하던 변덕이 고개를 꼿꼿하게 쳐든 것은 아파트로 이사한 후였다. 그가 한없이 작아만 보였다. 체구는 물론 초라해진 행색마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억지를 부렸다. 기쁘나 슬프나 묵묵히 곁을 지켜준 믿음에 찬물을 끼얹은 게 사실이다. 그를 떠나보내는 이 마당에 이제야 용서를 구한다.   


  건강하던 그가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여러 방면으로 손을 써보고 정성껏 치료를 해주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이별의 강물은 막을 수가 없었다. 가망 없다는 최종 진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제야 지금까지 그에게 해준 것이 하나도 없음에 설움이 봇물처럼 터졌다.


  화려하고 멋진 여자를 만났더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칠보단장 받으며 반들반들 윤기를 뽐냈을 텐데. 어쩌다 털털한 나를 만나 치장 한번 받지 못하고 숨 가쁘게만 달려왔으니 신세가 애처롭다. 내 역사의 한 페이지에 깊숙히 파고든 그를 어찌 헌 신짝 버리듯 내동댕이 칠 수 있으리. 어찌 할 바를 몰라 막막한 심정이다.

 

  그를 만난 지 8년째, 사람들은 회자정리(會者定離)가 쉽지 않다고 울상짓는 나를 위로한다. 그다지 싫증내지 않는 성격이더라도 몇 번은 헤어졌을 법한 기간이라고. 나는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보다 곰삭은 옛정에 더 끌리는 태생인가 보다.


  노오란 은행잎이 이별하듯 떨어진다. 그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애잔한 눈빛, 따스한 손길로 그의 몸을 마지막으로 어루만졌다.

 

   "다음 생은 부디 흙 묻히지 말고 안 마당 너른 푸른 잔디 위에서 귀한 대접받으렴."


  혹시 저승가는 길에 쓰일지 몰라 노잣돈 만 원을 가슴에 붙여주었다. 이별의 정표, 눈물 한 방울이 ‘똑’하고 떨어진다.


   “안녕, 나의 첫사랑. 서울 1그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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