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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Feb 05. 2023

왕족으로 다시 태어나다

왕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신분

  250mm.

 옆 반 남교사가 적어놓은 숫자였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내 눈을 의심했다


  ‘어머나, 세상에! 남자 어쩜 이렇게 아담할 수 있을까?’

 

 어린이날 기념 운동회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단체로 운동화를 구입하려 하니 발 치수를 적어달라는 교무 부장의 회람이 돌았다.  


  ‘250 바로 옆 칸에 내 발 치수를 적으라고?’


  아담한 남자 발 250 옆에 우람한 여자 발 2**을 적을 수는 없었다. 전교 방송에 마이크를 대고  ‘나, 발 큰 여자요.’라고 광고를 하라는 건가? 아무렴 나 스스로 망신 독에 빠질 수야 없지.

  그렇다고 빈칸으로 남겨둘 수는 없어 가슴이 콩당거렸다. 잠시 망설이다가 발이 커서 신발 사기에 애를 먹는 남동생을 떠올렸다. 선물로 주면 되겠다 싶어 당당하게 290이라고 적어냈다.  


  사건은 다음 날 아침 조용한 자습 시간에 일어나고 말았다. 갑자기 실내 스피커가 지직 거리더니 뒤이어 교감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 선생님, 발 크기가 290입니까?”


  당황스러운 질문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눈치를 보면서 스피커에 입을 바짝 댄 채 모기 만하게 말했다. ‘네’라는 소리가 잘 안 들렸는지 교감 선생님은 목청을 높여 다시 확인했다.


  “윤 선생님, 발 사이즈 290이 맞냐구요?”


  하는 수 없이 나도 톤을 높여 ‘네’ 라고 답하는 순간, 아이들의 눈초리가 일제히 나의 두 발로 꽂혔다. 그 이후 나는 ‘왕발’로 통했다. 마침 ‘왕발’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도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온 세상이 떠들썩할 무렵이었다. 방송사마다 경쟁적으로 선수의 커다란 발을 시도 때도 없이 클로즈업해 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제 발 저린 심정으로 슬그머니 내 발을 감추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발이 큰 여자를 국법으로 다스리지 않는 건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여자는 무조건 발이 작아야 한다는 불문율은 버젓이 존재한다. 부모님은 중국 여자들의 전족을 흉내 내며 내 발을 버선으로 꽁꽁 싸맸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이해는 되지만 발의 숨통을 옥죄는 일은 깨진 독에 물 붓기였다. 오랜 시간 어둠 속에 갇혔던 억울함이 반발심으로 작용해 더 커졌나 보다.


  앙증맞은 발 한번 갖고 싶은 것이 나의 평생 소원이다.

크지만 볼은 좁은 아버지 발, 작지만 볼은 넓은 어머니 발에서 하필 크고 넓적한 것만 쏙 빼닮은 운명이니 어찌 한탄하지 않으랴.


  여고 시절, 운동화를 신는 게 교칙이었지만 나에게는 구두를 맞춰 신을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 사춘기 여린 마음에 상처를 준 동네 구둣방 주인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본을 뜨기 위해 신발을 벗고 종이 위에 커다란 발을 올려놓을 때까지는 견딜 만했다. 아저씨는 항공모함 같은 발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발이 커서 가죽 값을 더 내셔야겠습니다.”


  주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냅다 호통을 치셨다.


  “뭐라고요? 지금껏 양복을 맞춰 입는 나한테 키 크다고 옷감 값을 더 내라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봤소!”


  아버지는 구둣방이 떠나가라 소리치셨다. 딸의 기를 살려주려고 일부러 으름장을 꽝꽝 놨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가게 안을 기웃거리게 했다. 그 바람에 나는 주눅이 든 채 귀퉁이 앉아 발을 숨겼다.


  가게에서 예쁜 신을 신었다 벗었다 호들갑 떠는 친구들 곁에서 머쓱하게 구경만 했던 대학생 시절은 어떤가.남자가 신는 커다란 운동화나 중성스런 두루뭉술한 구두로 사시사철을 버텨야 했다. 내게 있어 뾰족구두는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처럼 영원히 동화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맞선 보러 나갈 때도 정장 차림에 운동화 신은 꼴을 상상해보라. 선을 보던 첫날은 물론, 몇 년 간은 좀체 남편 앞에 나서지 않았다. 커다란 발을 보여줬다가는 기겁할까 봐 항상 조심했다. 체통을 중시하는 종가집 시댁에 가는 날이면 예를 깍듯이 차려 한복을 입곤 했다. 코가 날렵한 꽃 고무신은 왜 그리도 볼이 좁은지 발의 반도 감싸주지 못했다. 한복에 운동화 신은 꼴은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격으로 부조화였다.


  아버지는 입대하여 맞는 군화가 없어 며칠 간 농구화를 신었다고 한다. 예쁜 신발은 모두 그림의 떡인 딸이 안쓰러워 아버지는 눈물까지 흘리셨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대물림하게 되었다며 딸의 쓰린 심정을 알아주셨다.


   태교할 때는 내 못난 발을 닮을까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딸을 낳자마자 아이의 발부터 더듬어 볼 정도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딸아이의 발은 길기는 하지만 볼은 넓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 딸아이는 끝내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맘에 쏙 드는 구두를 찾고도 팥쥐의 발처럼 무슨 수를 써도 들어가지 않았다. 속상해하는 딸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대물림이 또 시작인가 싶어 걱정이었다. 지난 날, 내게 멋진 부츠나 샌들을 신지 못해 눈물 흘리셨던 아버지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려는 것을 애써 감췄다.


  언제까지 발 타령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이제 접어야 할 때다. 오랜 세월 나를 옭아맸던 별명부터 바꿔야겠다. 한글로 된 ‘왕발’을 한자인 ‘왕족(王足)’으로 바꾸면 어떨까. 억지스럽지만 사람들에게 ‘왕족(王族)’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함에서다.


  왕족으로 태어난 인생,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후세에 길이 전할 족적을 새기고 싶다. 이 커다란 발로 세상에 이로운 자취를 남긴다면 뼈대 굵은 집안의 자손으로서 체면은 조금 서리라. 나는 딸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슬며시 속삭였다.  

  

  "오늘부터 우리는 왕족(王族)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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