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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Jan 08. 2024

깔끔쟁이의 변

"새해는 털털한 연습"

   나는 깔끔쟁이라고 소문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나를 아는 많은 이들은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를 노래할지 모르겠다. 생긴 것이 까탈스러워 보이지 않고, 옷차림 또한 털털한데 무슨 깔끔쟁이냐는 거겠지. 하지만 절대 오해하지 마시라. 내가 강박적으로 깔끔을 떠는 것은 오로지 입으로 들어가는 것, 즉 음식에 관해서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둔다.


친정에서 가족행사가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엄마가 큰 소리로 나를 반겼다.

"얘들아, 언니 나타났다!"

부지런한 동생들이 멀리 사는 나를 배려하느라 먼저 와서 음식 준비를 시작한 모양이다. 물기를 머금은 상추와 깻잎이 채반에 한아름 담겨 식탁 위에 올라가 있다.

"깨끗이 씻었겠지?"

내 물음에 동생들이 빙그레 웃는다. 나는 그 웃음이 살짝 미심쩍어 야채를 다 쏟아붓고는 수돗물을 틀어 한 번 더 헹구었다. 뒤통수에 수돗물처럼 쏟아지는 엄마의 푸념은 어차피 내가 감수해할 일. 완벽하게 씻다 보 야채는 녹초가 되기 일보직전이다. 

"대충 살어. 흙먼지 먹어 죽은 사람 없어."

유난 떠는 게 못마땅한 엄마는 내가 들이닥치자마자 비상 걸렸다는 의미로 '나타났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접시에 음식을 담기 전, 반드시 점검하는 일이 있다. 깨끗이 씻어 찬장에 넣어두었다지만 꺼림칙스러운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얼른 개수대에 죄다 집어넣고 다시 박박 어야 속이 뻥 뚫린다. 이제 식탁에 음식을 올리기 전, 마지막 단계만 넘기면 된다.

"식탁은 깨끗이 닦았겠지?"

역시 동생들이 엄마랑 눈을 맞추며 빙그레 웃는다. 저 언니가 또 시작이네,라는 뜻이겠지. 모른 체하고 한 번 더 내 손으로 닦아야 마음이 놓이는 걸 어쩌라구.

꼴만 보고 있는 엄마의 속은 안 봐도 까만 숯덩이처럼 타들어가겠지.

"적당히 닦아. 그렇게 까장부려봤자 소용없어. 그러니 네 몸만 고단하지."

나도 눈딱 감고 넘어가고 싶지만 한번 굳어진 이 버릇을 무슨 재주로 제어하리오.




걷기도 할 겸 볼일을 보러 버스를 탔는데 하필이면 운전을 험하게 하는 기사님을 만나게 될 줄이야. 서울 시내버스 기사님의 운전 실력을 운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심기가 불편한 분이겠다는 의심이 들었다. 나는 재빨리 학창 시절을 기억해 냈다. 학생들을 실은 버스 안은 그야말로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해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학생 사랑이 지극했던 기사님은 한 명이라도 더 태워주려고 아주 난폭한 운전을 했다. 운전대를 일부러 급하게 꺾어서 콩나물을 한쪽으로 쏠리게 해 놓고, 벌어진 틈으로 콩나물 하나라도 더 타게 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내가 탄 차는 서서 가는 사람이 몇 안 되어 공간이 아주 넓었다. 그런데 급정차와 급출발에 지그재그 곡예운전까지 하다니, 백 프로 심리적인 영향 탓이겠지. 관성의 법칙을 최대한 활용하는 기사님의 운전솜씨에 내 몸도 바짝 긴장하는 건 당연지사. 이런 비상시에 적극 이용할 것은 역시 손잡이다. 나는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사전에 막기 위해 손잡이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언제나 유비무환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진리를 버스 안에서도 깨닫는다. 나는 공간을 확보한 뒤 중심을 잡고 편안하게 손잡이를 잡았다. 드디어 눈 내리는 바깥 풍경과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감상하는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앞으로는 차는 버리고 대중교통만 이용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찰나, 다시 한번 급정차하는 바람에 몸이 앞쪽으로 쏠렸다.  핸드폰에 눈을 박은 젊은이 몇이 앞으로 주르륵 밀려갔다가 멋쩍게 서 있던 자리로 돌아온다. 물론 단단히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나는 꿈쩍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이여, 유비무환 하라.


다음 역에서 한 아지매가 어깨의 눈을 털면서 올라탔다. 좁은 이마가 최대 약점이다 보니 얼굴 중 제일 먼저 보는 곳이 이마다. 나보다 더 좁은 이마에 꼬불꼬불 단발파마가 어쩌면 저리도 안 어울릴 수가. 어깨에 메고 있던 기저귀가방 같은 것이 자꾸만 흘러내리자 연신 추스른다. 옆에서 보는데 하도 불안하여 '얼른 손잡이를 잡고 두 다리로 바짝 버티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저렇게 양손을 늘어뜨리고 있다가 급정차로 인해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대자로 누울 텐데 무슨 망신이람.  


아지매가 갑자기 가방을 뒤지며 한참 부스럭대더니 하얀 휴지 조각 한 장을 꺼낸다. 갑자기 웬 휴지? 설마 코를 풀려는 건 아니겠지? 아지매가 위로 손을 뻗는가 싶더니 휴지로 손잡이를 먼저 감싸 쥐는 게 아닌가. 코로나 시대는 물러갔구먼 무슨?

'아이쿠야, 깔끔쟁이셨구나.'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차가 급출발해도 손잡이를 잡지 않던 이유를. 불특정 다수의 손이 거쳐갔던 손잡이를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노려보기만 했던 이유를. 아지매가 맨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있는 나를 스윽 한번 쳐다봤다. 마치 미개한 사람을 보는 듯한 눈초리로 이렇게 말하려는 듯했다.

'불특정다수가 잡았던 그 손잡이를 어떻게 그냥 맨손으로 잡을 수 있니?'


아지매가 서 있는 앞에 자리가 났지만 앉지도 않고 휴지로 감은 손잡이를 잡은 채 계속 서 있다.

'그렇지. 불특정다수의 엉덩이가 거쳐간 의자에 그냥 앉으면 절대 안 되겠지.'

깔끔이라면 나도 한 이름 하는데 이쯤 되면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할 수준이로군. 아차, 내가 보는 저 아지매 모습이 엄마가 보는 내 모습이겠구나. 갑자기 눈앞에 엄마가 불쑥 나타나더니 나를 꾸짖는다.

"너무 깔끔을 떨어도 복이 달아나는 법이여."

수더분하게 살아야 팔자가 사납지 않은데 너무 까탈스러워 걱정이라고 매일 타박하던 그 말씀이다.


다음 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차가 급정차했다.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때까지 고이 모셔두었던 아지매의 오른손이 덥석 손잡이를 잡는 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불특정다수가 만져서 오염되었을지도 모르는 그 손잡이를 맨손으로 잡다니. 아이고, 이를 어쩌나.


그때 엄마가 다시 나타나서 이번에는 그 아지매를 꾸짖는다.

"그것 보유. 깔끔 떨어봐야 소용없쥬? 소탈한 게 최고지, 혼자 잘난 체해봤자 필요 없는 거유."


엄마, 오늘 보니 너무 티 나게 깔끔 떠는 거 좋아 보이지 않네요. 새해에는 엄마의 바람대로 털털하게 살도록 노력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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