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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Jan 05. 2024

머릿니 잡던 날

토요일은 이 잡는 날

   초등학생들 사이에 머릿니가 퍼진다는 뉴스를 TV로 접했다. 요즘 시대와는 전혀 어울릴 법하지 않은 이야기라 절로 눈길이 갔다. 생활환경이 날로 좋아짐에 따라 지나칠 정도로 위생에 철저한데 머릿니라니. 서로 다정하게 이를 잡아주는 모습은 동물원 원숭이한테서나 볼 수 있는 때가 아닌가.

 

예전에는 동네 변두리에서 이 잡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볕이 잘 드는 곳에서 무릎에 누인 아이의 머리칼을 헤집는 아낙네를 본다면 이를 잡고 있는 게 틀림없다. 햇살이 따사로워서일까, 엄마의 손길이 따뜻해서일까? 눈을 감은 아이는 금세 콜콜 잠이 들기도 했다. 이 잡을 때 들리는 톡톡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더벅머리에 코흘리개라는 별명이 붙은 아이들 머리칼에는 백발백중 허연 서캐가 다닥다닥 붙어살았던 것 같다.


집마다 이가 얼마나 많았으면 동사무소에서 박멸제까지 무료로 나눠주었을까.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마는 잠들기 전에 밀가루 같은 허연 가루약을 한 주먹 덜어서 내 정수리에 털어 넣었다. 넓은 수건을 단단히 씌워주면서 조심스레 잠을 자라 당부했지만 옴짝달싹 못 하는 장승 흉내를 내는 것은 너무 어려운 숙제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수건은 멀찌감치 달아나 있고, 까치집을 지은 내 머리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이 가관이었다. 이불 위에 찍힌 작은 점들을 보고야 그들의 죽음을 눈치챘다. 세숫대야에 머리를 감는데 깨알 같은 이들이 둥둥 떠 있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머릿니를 원 없이 많이 죽여본 적이 있다. 야트막한 산과 밭으로 둘러싸인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아주 작은 학교에서였다. 발령장을 들고 학교 운동장을 밟던 그날, 세상을 모두 얻은 기분이었다. 복도를 지나 앞뒷문을 활짝 열어젖힌 교실 문턱을 넘어서는데 가슴이 두 방망이질 쳐댔다. 60여 명 아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잔잔한 내 마음에 철썩, 하고 파도가 쳤다. 웃을 듯 말 듯 숨죽인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던 내 생애 첫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더러는 땟국물이 쫄쫄 흐르는 옷차림에 반들반들 기름 낀 머리칼, 마른버짐이 꽃처럼 피어난 아이도 보였다. 하루 벌어 근근이 사는 집 아이들의 옷차림은 남루했다. 오히려 고아원에서 등교하는 몇몇 아이들의 옷차림이 더 깨끗했다.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로 싸늘한 봄날을 버텨내는 아이도 있었으나 환경에 지배를 받아 위축된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하나같이 반짝이는 눈망울로 서로 잘 어울려 지내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뭉클했다. 가슴에서 뜨거운 감정들이 올라오면 아이들 손을 잡고 뒷산으로 올라가 함께 마을을 내려다봤다. 누가 뭐래도 아이들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수한 영혼을 지닌 나의 보물들이었다.


머리를 빗겨주고, 때 낀 손톱을 깎아주고, 가끔 떠꺼머리 아이들의 머리도 손질해 주었다. 달라진 모습이 쑥스러운 아이는 거울 앞에서 몸을 배배 꼬며 멋쩍게 웃었다. 아침부터 긴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 교실로 당당히 들어오는 아이는 이 어설픈 이발사의 손길을 받고 싶어 하는 응석이었다. 내가 교실에서 이를 처음 발견하게 된 것은 어떤 여자애의 머리를 땋아줄 때였다. 유난히 새까맣고 기름기가 많은 머리에는 영락없이 이가 살고 있다더니 딱 맞는 말이었다.

 

이를 소탕하기 위해 우리 반은 작전을 짰다. 매주 토요일을 ‘이 잡는 날’로 정하여 정기 검사를 하자는 거다. 거부하거나 트집을 잡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학부모들도 담임교사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신뢰했지, 감시하거나 훼방 놓지 않았다. 무엇을 하든 교사의 사랑이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쯤은 아이도 알고, 부모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이 잡는 날 아침, 아이들은 줄을 서서 교탁 위에 깔린 커다란 백지 위로 고개를 수그린다. 나는 준비한 참빗을 머릿속 깊숙이 넣어 쪽쪽 빗질을 시작했다. 머릿속에 단단히 둥지를 튼 살진 이들이 참빗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백지 위로 떨어진다. 나동그라져 발발거리며 도망치는 이들을 재빨리 각자 엄지손톱으로 누른다. 깨 볶을 때 나는 경쾌한 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다. 죽음으로 몰리면서도 그들은 캔버스에 붉은 칠을 한 추상화 한 장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열정은 컸으나 시행착오가 많았던 햇병아리 교사 시절. 이제 와 돌이켜보니 나는 죄를 많이 지은 교사였다. 참빗 하나로 육십 명이 넘는 아이들 머리를 죄다 훑어버렸으니 소름이 끼친다. 멀쩡한 머리에도 이를 옮길 수 있는 참빗 생각을 그때는 왜 못 했을까? 빈대 잡는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운 격이니 나의 무지를 어떤 수로 속죄할지.


학생의 인권 침해니 인격 모독이니 하는 말로 교사의 두 손을 꽁꽁 묶어놓은 지 오래됐다. 교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도 하지 못하게 만든 요즘 시대에는 감히 생각조차 못 할 일이다. 머릿니로 고생하는 아이가 아무리 많다 한들 다시 참빗을 집어들 자신이 없다. 열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세상을 어여삐 바라보지 않는 눈길을 피해 갈 용기가 없는 탓이다.


지금은 중년 끝자락에 들어섰을 나의 첫 아이들. 설렘과 사랑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이야기'를 어디선가 추억하고 있을 거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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