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얼굴이 창백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편이다. 앉았다 일어설 때면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 현기증이 심하면 몸이 휘청할 때도 있다. 머릿속이 얼얼하면서 서늘해지면 혹시 큰 병이 아닐까 덜컥 겁도 난다. 단 몇 초간이지만 기분이 오싹해지는 찰나다.
삼십여 년 전쯤에 시어머님을 모시고 병원을 갔는데, 나를 보던 의사는 며느리가 더 죽게 생겼다며 검사를 서두르라 했다. 대학병원까지 가서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수혈하기 일보 직전인 빈혈 환자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다. 정확히 말해 혈색소가 정상 수치에서 훨씬 떨어지는 철 결핍성 빈혈이었다. 수치가 너무 낮고, 그 적은 양조차 영양가가 없는 묽은 피라고 한다. 하루 세끼 식사를 정상적으로 하는 사람한테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결과라니 이상한 상황이었다. 처방해 준 약을 규칙적으로 먹고는 있으나 정상 수치로 가는 길은 멀고도 지루했다.
얼마 전에도 병원을 찾아 검사했으나 만족할 만한 수치까지는 까마득했다. 의사는 내게 일상생활을 어떻게 하느냐, 직장생활은 어찌하느냐, 걷다가 힘들면 주저앉아 쉬느냐? 는 등의 질문을 했다. 집안일도 직장생활도 별 탈 없이 잘하고 있으며 운동도 열심히 하는 편이라 답하니 의아한 눈빛이다. 걸음은 남보다 한 발짝은 앞서 걷는 편이고, 아무리 힘들어도 낮잠은 자지 않는다는 말에 다시 한번 고개를 갸우뚱했다.
검사 수치상으로 볼 때는 정상적인 생활이 도저히 불가능하고, 내과에서 검사했다면 당장 수혈하자며 달려들 것이라고 겁을 준다. 의사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며 과학적으로 볼 때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단정을 내렸다. 아무런 소득 없이 병원 문을 나서는데 마침 교수님 말씀이 떠올랐다.
교수님은 제자들에게 틈이 날 때마다 체질에 맞는 음식섭취로 건강을 챙기라 했다.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체질에 맞게 사는 것이 건강 최고의 비결이라 했다. 늘 주머니 속에 가지고 다니는 호두 알이나 바짝 마른 대추 알을 꺼내 우리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체질감별을 즐겨해 주셨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맥이 안 잡힌다면서 놀라셨다. 맥이 멎은 듯 가물가물하니 건강하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선천적으로 기가 허한 체질이라 했다. 몸을 항상 따뜻하게 하고 체질에 맞는 음식을 섭취해야 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어떨 때는 제자들한테 기를 불어넣어 준다면서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명상도 하셨다.
나는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대 그럴 때마다 건강은 뒷전이고, 교수님의 기가 나한테도 전달되어 좋은 글이나 쓸 수 있게 됐으면 하고 바랐다. 생각해 보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바람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었다. 영면에 드셨기에 이제는 기 받을 곳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펼쳐진 수많은 이야기를 나 스스로가 글로 엮어 나갈 수밖에.
나는 영양가가 없는 묽은 피를 가진 빈혈 환자로 의학적으로 봤을 때는 아주 불가사의한 사람이다. 그동안 써왔던 글들을 찬찬히 훑어보니 체질 탓이라고 해야 할까. 내 묽은 피만큼 싱거운 글도 많고, 영양가라고는 씨 한 톨 찾아볼 수 없는 글도 많다.
작문 수업 시간에 목에 힘을 주어 말씀하시던 게 생각난다. 독자들의 입에서 싱겁다느니 영양가 없다느니 하는 평이 나와서야 어디 글 쓰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냐고.
“글을 쓰는 사람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감동이 없는 글은 잡문이요, 쓰레기에 불과하다.”
진한 감동이 묻어나는 진짜 글을 쓰라고 제자들을 향해 일침을 놓던 말씀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본다. 빈혈 환자인 나한테 영양 있는 글은 과연 언제쯤 탄생하려나.
나만의 개성 있는 소재를 찾아 영양이 듬뿍 담긴 글을 한번 써보고 싶은 오늘이다. 훅 밀려든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글감을 찾으러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만든다. 오래전에 받았던 교수님의 기까지 들춰내면서 욕심을 부린다. 혹시 하늘에서 이 꼴을 내려다보면 한 말씀하실지도 모르겠다.
“에이, 이런 싱거운 사람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