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정연 Jan 09. 2019

‘제한’과 ‘한계’를 혼동하지 마라

더 나올 것이 없다고 판단돼 남이 버리고 간 폐광.

한 청년이 들어가 무려 5년 동안 망치질을 한 사람은 말 그대로 보물찾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금덩이를 위해 더구나 남이 버리고 간 폐광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실낱같은 희망만 가진 채 망치질만 하였다. 하루 이틀이나 며칠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땅을 파는 힘든 일을 무려 5년씩 매달린다는 것은 보통 이상의 집념을 가지고는 안된다. 같이 망치질을 했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줄어들다가 모두 지쳐서 떠나 버렸다. 결국, 이 사람만 남았다.

모두 떠나 힘이 빠진 나머지 읍내로 내려가 술만 마시고, 금맥을 알려주지 않는 산신령을 원망하였다. 화가 난 나머지 산신령에게 돼지머리도 아닌 냄새가 고약한 개고기로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평소 가까이 자주 보는 너럭바위를 망치질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둔탁한 소리만 들리다가 망치질을 하면 할수록 날카로운 금속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5년 동안 찾고 찾아 헤매던 금맥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이 사람은 조선 최고의 부자 중 한 사람인 최창학이다. 남들은 어려움에 부딪혀 포기하였지만, 최창학은 남들이 뭐라 해도 무려 5년 동안 망치질을 하였다. 또한, 최창학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직접 설계사와 건축사를 데리고 와 1천 7백 평대지 위에 290평 자리 양옥을 화려하게 지은 ‘경교장’을 김구 선생에게 조건 없이 헌납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일행들은 스스로 포기한 자신들을 원망하였다. 차이가 무엇일까? 일행들은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고 최창학은 ‘한계’라고 자신을 규정지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나는 이것밖에 못 해.’ ‘나는 여기까지인가 봐.’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것은 한계가 아니라 ‘제한’에 불과하다. ‘제한’은 자신을 깎아내려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만, ‘한계’는 그다음 너머 더 발전할 기회를 제공하는 긍정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한계는 ‘능력이 실제 작용할 수 있는 범위’를 뜻하지만, 제한은 ‘일정한 선을 정하고, 그 선을 넘지 못하게 막음’을 뜻한다. 한계는 자신의 능력이 작용할 수 있는 범위고, 제한은 넘지 못하게 막는 의미다. 적어도 한계라는 단어는 자신이 진정 최선을 다해 노력을 다하였는지, 그리고 간절함을 가지고 무슨 일이든 달려들었을 때 사용할 수가 있다. 반면 제한은 스스로가 아닌 주변 환경이나 타인에 의해 만들어져 자신의 능력과 꿈을 망각한 채 침몰하게 만드는 암초와 같다.

학생들이 고등학교 입학할 때는 대단한 의욕을 불태우며 시작한다. 하지만 1학기 첫 중간고사에서 자신의 결과를 보고 나서 그때부터 스스로 ‘제한’에 자신을 가두기 시작한다. 그 원인은 자신보다 더 열심히 하는 주변 친구들에 의해 자신을 밑천으로 내려보낸다. 더 큰 문제는 또 발생한다. 다음 기말고사 때 목표는 자신이 스스로 가둔 ‘제한’ 내에서 설정한다. 이렇게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내려가고 만다. 주변 친구들을 보고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

학생들과 식당에 가면 배가 고프다고 이것저것 시키는 학생들이 있다. 음식 나오자마자 음식이 언제 나왔는지 모르게 순식간에 사라진다. 정신없이 먹다가 하는 말은 “도저히 못 먹겠어요. 배가 터질 것 같아요. 한계가 왔어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계가 맞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 정신없이 먹는 것에 집중하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반면 한 시간도 못 채우고 공부하다 SNS를 검색하면서 “피곤해서 공부 못하겠어요. 제 머리가 한계에 왔어요.”라고 말하는 학생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한계가 아닌 ‘제한’에 불과하다. 정신없이 먹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공부에 매달리지 않았기에 제한인 것이다. 더 웃긴 것은 자신은 스스로 제한은 할 수 있어도 한계는 지을 수 없다. 자신이 타고난 능력도 모르고,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계라는 것을 스스로 짓지 않고 오히려 기회를 발판으로 삼았다.

42.195km를 달리는 장거리 경주 종목인 마라톤에서는 약 35km를 ‘마의 구간’이라고 칭한다. 그래서 대부분 4분의 3은 달렸는데 나머지 4분의 1을 남겨두고 포기한다. 그런데 왼발이 248mm 오른발이 244mm 짝 발인 마라토너 선수가 있었다. 더구나 이런 짝 발에 적지 않은 나이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였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3초 차이로 은메달에 머물고, 2000년 도쿄 마라톤 대회에서 8초 차이로 은메달에 아쉽게 머물렀다. 언론과 사람들은 이제 나이도 있고 힘들어 안쓰러워 보이니 그만 뛰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도전하였지만 24위로 뒤처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 마라토너는 자신에게 한계를 정하지 않았다. 더 달릴 수 있고 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2007년 3월 18일 동아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국제대회 7번째 우승이었다. 이 선수가 달린 거리를 계산해보니 무려 지구 네 바퀴 반을 돌았던 38살에 한국 신기록 보유자인 이봉주 마라토너다. 매일 30km를 달리고 경기 전에는 단백질과 탄수화물로 지독한 식이요법을 하며 한계를 넘어 기회를 보았다. 이봉주 선수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짝 발로 달리는 게 고통스러울 때면 아픔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달렸습니다.”

이봉주 선수가 도쿄 마라톤 대회 후 사람들이 그만 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분명 적지 않은 나이도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이 정한 선은 ‘제한’이라는 틀에 자신을 가두게 된다. 그는 오직 자신의 노력만 믿고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한계’라고 규정지었다.

우리도 남들에게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다.’ ‘너는 할 만큼 했어. 그러니 쉬어도 돼.’라는 말들을 종종 듣는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자기 위안과 기울인 노력에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만족감에 자신을 맞춰나가는 우를 범하게 된다. 특히 학교에서 이런 우를 범하면 기뻐하는 학생이 누구인지 아는가? 바로 상위권을 유지하는 학생들이다. 상대평가에서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맞수 친구들이 스스로 제한하고 그 틀에서만 노력하게 되면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이 습관으로 잡히면 사회에서까지 이어지게 된다. 사회 역시 무한 경쟁인데 그런 환경에서 똑같이 자신을 제한에 가두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경쟁에 무조건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남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사회에서 성공하는 1등은 한 명이 아니고 수천 명 아니 그 이상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재능과 노력에 제한을 짓지 말고 어제의 자신보다 더 발전하려는 기회를 줘야 한다. 남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은 자신을 서서히 침몰시키는 경기이며,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더구나 경쟁이란 시합은 매일 매일 반복된다.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키려는 기회를 스스로 더 주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

“훈련하다 보면 늘 한계가 온다. 근육이 터져 버릴 것 같은 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순간, 주저앉아 버리는 순간. 이런 순간이 오면 가슴 속에서 뭔가가 말을 걸어온다. ‘이 정도면 됐어.’ ‘다음에 하자’ ‘충분해’하는 속삭임이 들린다. 이런 유혹에 문득 포기해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때 포기하면 안 한 것과 다를 바 없다. 99도까지 열심히 온도를 올려놓아도 마지막 1도를 넘기지 못하면 영원히 물은 끓지 않는다고 한다. 물을 끓이는 건 마지막 1도, 포기하고 싶은 바로 그 1분을 참아내는 것이다. 이 순간을 넘어야 그다음 문이 열린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갈 수 있다.” -김연아 지음<김연아의 7분 드라마> 중앙출판사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은 우리도 자주 듣는다. 그 속삭임은 우리에게 포기를 강요하고 자기 위안을 주는 이야기들을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처음으로 보내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 뇌 역시 변화를 싫어한다.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 노력을 하게 되면 우리의 뇌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강하다. 꿈을 설정하고 실행으로 옳기면 먼저 우리 뇌는 어색함을 인지해 몸이 피곤하고 힘들다는 반응을 보낸다. 그렇다고 포기해야 할까? 실행으로 옮겼다는 그 자체는 자신의 삶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을 ‘제한’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현재 모습 이대로 미래까지 이어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

처음에는 어색할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형성된 습관을 한 번에 깨뜨리는 것은 힘들지만 어색함을 즐겨야 한다. 어색함에 적응할수록 제한이란 습관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매일 매일 어색함을 느낀다는 것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신호다. 또한, 어색함을 강하게 느낄수록 발전 가능성을 시사하는 바도 크다.

자신이 평소 마음속에 담아둔 꿈을 제한하지 말고 꺼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가슴속에서 꺼내 보아라.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느끼고, 거친 호흡과 함께 자신의 심장 박동을 빨리 뛰도록 만드는 꿈을 더 선명하게 눈을 감고 그려보아라. 목적지에 도착하는 과정에는 어려움이 눈에 보이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한 후 얻는 것과 만족감을 느껴보면 지금까지 자신을 제한한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환경과 타인에 의한 ‘제한’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으로 여기고, 자신을 과소평가하려는 ‘한계’라는 단어는 한 발자국만 내밀면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으로 만들어야 한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이다.” -데일 카네기    

매거진의 이전글 단점까지 사랑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