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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에 감사

무던함 속의 풍부한 삶

[길을 몰라서 길을 걷습니다]는 매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글을 읽기 전 산티아고 용어>

bar(바) = 우리나라의 카페와 비슷한 개념. 커피, 음료, 토스트 등을 파는 식당.

albregue(알베르게) = 순례자 숙소

pilgrim(순례자) =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


 첫 사회생활을 할 때 마음의 부담이 많았다. 왜냐하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기한 안에 일을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에게 주어지는 일은 마치 돌발상황에 맞닥뜨린 것처럼 무서웠다. 그래서 아침 6시 출근 버스 안에서 '오늘 하루 제발 무탈하게 끝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었다.


 마음이 힘들 때면 현재 감사한 것들을 떠올려 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때 감사할 거리를 찾으려고 했었다. 첫 번째, 비록 편도 한 시간 반 통근이지만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서 감사하다. 둘째, 어쨌든 지금 일을 할 수 있고 돈을 벌고 있어서 감사하다. 셋째, 점심이 맛있어서 감사하다. 그런데 매일 감사를 쥐어짜 내려해도 이 세 가지밖에 없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감사함이 똑같았다.


작은 것에도 감사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보면 십자가와 사진이 놓여있는 걸 왕왕 발견할 수 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길 위에서 돌아가신 순례자들을 기리는 곳이다. 사인은 다양하나 그중 하나는 탈수도 있다. 어느 날은 '와 진짜 걷다가 죽을 수도 있겠는걸?'이라고 생각한 날이 있었다.


 팜플로나에서 레이나로 가는 날이었다. 그 사이 거리는 21km이다. 레이나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40분쯤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한 마을을 더 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다음 마을은 5km 떨어진 곳이었는데 거리보다는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와 지형이 문제였다. 12시 정오에 땡볕 태양 아래 나무가 없는 산을 올라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물도 거의 동이 난 상태였다. 그 흙 산을 오르고 오르고 어쩌다가 나무 한그루 밑에 그늘이 있으면 쉬어서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걸었다. 어찌나 태양이 뜨겁던지. 길을 가던 중에 익숙한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찜질방 황토방 냄새였다. 태양이 흙산을 달구어 황토방 냄새가 난 것이다. 그런 길을 물 없이 걷고 있는 나.


 이젠 마지막 남은 물 한 모금도 끝났다. 더 이상 못 갈 것 같은데 생각이 들 때쯤 마을 입구에 왔다. 마을 입구에 약수터가 있었다. (산티아고는 길 중간중간에 물을 떠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어찌나 그 물이 감사하던지. 그 자리에서 물 한 컵을 원샷했다. 이 물 한잔이 감사했다.

마실 수 있는 물

 

 물뿐만이 아니다. 흔히 메세타 길이라고 불리는 고원, 평지길이 있다. 이 길 역시 나무 한 그루 없는 길이 있다. 날씨가 맑아야 주변 풍경도 예쁘고 걷기도 좋지만 유독 날씨가 맑으면 덥다. 스페인의 태양에 힘들어서 땅만 보고 걷다가 구름이 어쩌다 위를 지나 그늘을 만들어 주면 그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아~ 좀 살겠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의 길


 모든 순례자들이 감탄하고 감사해 한 알베르게도 있다. 그 알베르게는 샤워실에 순례자들을 위해 샴푸와 트리트먼트, 바디워시가 놓여 있었다. (일반적인 알베르게는 없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평소 일반적인 여행이라면 숙소에 샴푸가 있더라도 내가 챙겨간 샴푸를 쓰곤 한다. 그런데 이곳은 순례길이 아닌가! 나 역시 비누로 머리와 온몸을 씻고 있었다. 거품이 안 나오면 안 나오는 데로. 그런데 이 알베르게에 거품이 잘 나는 샴푸가 있다니. 게다가 트리트먼트까지. 오랜만에 제대로 씻은 기분에 행복하고 감사했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곳에 있는 다른 순례자들도 "Those made me happy.(그것들이 날 행복하게 만들었어.)"라고 말하며 공감했다.

샴푸를 준 알베르게 중 하나




 없어도 괜찮아.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포용하고 수용하는 마음까지 넓혀준 것일까? 일상적인 생활이었다면 감당하지 않았을 일들도 순례길에서는 다 괜찮아졌다. 순례길을 준비할 때 가장 걱정했던 것은 배낭 무게였다. 무조건 가볍게 가야 한다는 생각에 로션, 폼클렌징 등 액체류는 정확히 사용할 만큼만 덜어서 갔다. 즉, 로션은 66번 펌핑, 폼클렌징은 35번 펌핑으로 소분해서 챙겼다. 그런데 선크림을 두껍게 바른 탓일까 폼클렌징 한번 세안으로는 선크림이 씻겨지지 않았다. 완전히 선크림을 지우기 위해 여러 번 세안을 하니 준비했던 폼클렌징은 2주도 안 되어서 모두 써버렸다. 뭐 이제 어쩌겠나 하는 마음으로 얼굴도 그냥 비누로 세안해 버렸다.


 순례길이 아니었다면 얼굴을 그냥 손비누로 씻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더욱이 예민한 피부이기 때문에 얼굴만큼은 순한 제품을 고수하곤 했다. 그런데 비누로 세안하다니. 그런데 또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동안 내가 중요하지 않은 무언가를 마음속으로 고집부렸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길 도중에 빗도 부러졌다. 꾸밀 필요가 전혀 없는 순례길이지만 아침마다 머리를 빗는 건 습관이다. 그런데 머리를 빗을 빗이 부러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빗이 없으면 그냥 손으로 슥슥 빗어도 충분하다. 또 씻고 나서 다시 마을 구경하러 나갈 때, 해가 쨍쨍해도 선크림을 바르지 않았다. 피부 좀 타면 어때. 주근깨 좀 생기면 어때. 지금 이 따뜻한 햇빛이 좋은데.

머리도 안 빗고 선크림도 안 바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감사하며. 좋으면 좋은 대로 감사하며.




 순례길에서의 물이, 구름 그늘이, 샴푸가, 이런 사소한 것들이 감사했다. 이전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것들이 감사로 다가왔다. 이런 아주 사소한 것들이 말이다. 순례길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지금도 종종 감사함을 잊을 때가 많다. 여전히 사소한 것에 예민하게 반응할 때도 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감사함이 눈에 들어오고 사소한 것을 고수했던 것들도 내려놓게 되었다.


 요즘은 그냥 오늘 나눈 대화가 재밌어서 감사하고, 날씨에 감사하고, 하루가 그냥 무탈한 것에도 감사하고. 그동안 놓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 제일 감사한 것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비록 걱정거리는 여전히 있지만 말이다. 삶이 무던함 속에서 풍부해졌다.



 산티아고 순례길 Tip2. 준비물_발 편
양말은 발가락 양말과 두꺼운 양말 두 개를 신으면 좋아요. 발가락 양말은 물집이 잡히는 걸 방지해 주고 두꺼운 양말은 땀 흡수를 잘해서 좋답니다.
고로 신발은 반 치수 또는 한 치수 큰 신발을 구매하시는 게 좋아요.
혹시라도 물집이 잡혔다면 밴드로 봉인하세요. 이틀정도 잘 봉인하면 굳은살로 변할 거예요.
슬리퍼나 샌들을 한 켤레 챙기세요. 알베르게에 도착하고 씻고 나서는 슬리퍼나 샌들을 신어서 발가락에도 휴식을 주는 게 좋아요.
로션타입 파스를 하나 챙겨가는 걸 추천해요. 자기 전에 파스를 바르고 발목, 종아리, 무릎을 마사지하면 다음날 걷기에 조금 수월하답니다. 로션타입 파스도 바르고 나서 뜨거워지는 타입과 시원해지는 타입 두 가지가 있는데, 시원해지는 타입을 추천해요.
buen camino.
수고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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