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완주

[길을 몰라서 길을 걷습니다]는 매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글 읽기 전 산티아고 용어>

bar(바) = 우리나라 카페와 비슷한 개념. 커피, 음료, 토스트 등을 파는 가게

albregue(알베르게) = 순례자들을 위한 개념

pilgrim(순례자) = 산티아고를 걷는 모든 사람들


약 800km 산티아고 순례길은 크게 3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생장부터 메세타 길 초입까지, 메세타 길부터 레온까지, 레온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세 부분으로 나누는 기준은 길의 특성과 풍경이다. 생장부터 메세타 길 초입까지는 크고 작은 산을 오르락내리락한다. 메세타 길은 넓은 고원이 이어지며 탁 트인 시야, 시야 끝까지 있는 직선의 길이 펼쳐진다. 다음 레온 이후부터 종착지는 다시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숲길을 걷고 순례길의 하이라이트인 철의 십자가를 만난다.


레온을 지나고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고, 더블린에서의 단기 숙소를 구했다. 또, 더블린에서 일주일을 지내고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표도 재확인했다. 해야 할 일을 마치니 곧 이 길이, 이 생활이 끝나간다는 느낌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아직 종착지까지 10일 정도는 더 걸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이 길이 끝나는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순례길 위에서 하루하루 차곡차곡 걸었던 이 생활처럼 한국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마음과 느낌은 아쉬움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고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면 기념으로 무엇을 할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끝내주게 사진 찍기, 완주증 받기, 숙소에서 씻고 다시 성당 쪽으로 나와서 맥주 마시기, 그동안 적었던 일기 다시 보기 등등. 혼자서 그 완주를 완벽하게 축하하기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도착


사실 싸리아 이후부터는 마지막 100km 구간만 걷는 순례자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다. 그리고 순례의 느낌보다는 관광의 느낌이 강해진다. 사람들은 단체로 와서 무리를 지어 걷기도 하고, 스탬프를 찍는 곳에는 줄이 있기도 하다. 길에는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다. 싸리아 이전의 아름다웠던 순례길의 느낌이 많이 옅어졌다. 굳이 이런 순례길을 걸어야 할까? 하는 마음에 버스를 타고 종착지까지 갈까? 아주 잠시 생각했다. 그래도 4일 정도만 걸으면 완주인데 그 길을 몇 시간 만에 건너뛰면 후회할 것 같아서 두 발로 걷기로 했다.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도착지까지 약 27km를 걸으면 길 위에서의 삶이 끝난다. 평소처럼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종착지에 도착하면 계획했던 혼자만의 완벽한 기념행사를 할 생각을 하며 걸었다. 그런데 도착지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사람들이 길을 막고 비켜주질 않았다. 짜증이 살짝 났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잠시 점심을 먹으면서 사람이 조금 빠지길 기다렸다. 그런데 점심이 형편없었다. 심플 햄버거를 주문했는데, 이토록 심플할 수 있을까? 빵과 고기 패티 한 장만 나왔다. 상추 하나정도는 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신경질이 조금 났다. 맛없는 것 먹고 배부를 때가 제일 화나는데...

(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27km (우) 심플 햄버거...


그래도 기분을 다시 고쳐먹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 내 계획들....ㅜㅜ' 산티아고 도시에 입성했다. 그래도 성당은 도시 중앙에 있기 때문에 한참 더 걸어야 한다. 점점 성당 꼭대기가 눈에 보였고 그것만 보고 길을 걸었다. 드디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이 눈앞에 들어왔다. 성당 앞 광장에는 순례자들이 빼곡히 있었다. 순례자들은 서로 껴 안기도 하고 누군가는 감격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또 누구는 배낭을 내려놓고 그 앞에 누워 그 순간을 최대한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상했다. 그리 감동적이지도 감격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비도 오고 사람도 많은 이 공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기념은 남기고 싶어서 아주 빨리 사진을 찍고 순례자 사무소로 가서 완주증을 받았다. 혹자는 완주증을 받는 그 순간이 그렇게 뿌듯하다고 하던데 나는 그냥 정신이 없었다. 비가 와서 몸이 젖어 있지, 완주증을 받을 손은 없지. 계획이고 뭐고 빨리 알베르게로 가야겠다!

(좌) 산티아고 입성 (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완주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바로 씻었다. 씻고 나서의 계획은 다시 성당 쪽으로 가서 맥주 마시기. 그런데 창밖을 보니 비가 억수같이 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안 나갔다. 알베르게 안에 있는 매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완주 기념을 할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새벽에 성당으로 가서 어두운 배경으로 성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미사를 드리기로. 그리고 버스를 타고 묵시아로 가고 다음 날 피스테라로 가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5시에 기상했다. 아침 미사 시간이 6시 30분이었다. 기상해서 5시 반에 짐을 싸고 성당 앞 광장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사람이 2명밖에 없었다. 나와 다른 순례자. 아주 고요한 시간에 오롯이 나와 성당이 마주하고 있었다. 평화롭게 사진을 찍고 미사를 드리러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순례길을 걸으며 종종 미사를 드렸지만 감회가 색달랐다. 미사가 끝나고 야보고의 무덤을 보러 갔다. 미사를 드리는 곳에서 왼쪽으로 가니 약간 반지하처럼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 아래 야고보의 무덤이 있었다. 잠깐 기도를 하고 나왔다. 성당에서 나오니 밖은 해가 뜨고 있었다. 아주 잠깐 해가 비추는 성당을 바라봤다. 또 기념사진을 찍고 묵시아로 가는 버스 터미널로 이동했다.

(좌) 새벽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우) 성당 내부/미사
(좌) 야고보 무덤으로 내려가는 길 (우) 야고보 무덤



세상 끝에서


묵시아로 가는 버스를 탔다. 보통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가 종착지이지만 종종 어떤 순례자들은 세상 끝이라고 불리는 피스테라까지 걷는다. 순례길에서 만난 순례자 두 분도 걸어서 갈 거라고 했다. 내가 지금 버스로 가는 이 길도 순례길이다. 버스 창밖을 보는데 순례길 표지판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에겐 2일 걸릴 그 길을 한 시간 만에 가고 있으니 묘한 쾌감이 들었다.

묵시아로 가는 버스 안


묵시아는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묵시아는 '시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마리아가 돌을 타고 이곳에 왔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돌이 묵시아 성당에 있다고 해서 해안길을 따라 성당으로 갔다. 신기하게 성당은 길이 아닌 바다를 바라보게 끔 지어져 있었다. 마리아가 타고 왔다고 추정되는 돌도 구경하고 성당 내부도 구경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 묵시아에도 0km 비석이 있었다. 이 0km 비석의 의미는 순례자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의미이다. 즉, 진짜 종착지인 셈이다.

묵시아


그 근처 바위에 배낭을 내려놓고 걸터앉아서 일기를 썼다. 성당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파도소리가 평화로웠다. 알베르게에서 저녁을 먹고 일몰시간에 또 이 장소로 나왔다. 그동안 쓴 일기도 다시 읽었다. 해가 다 지고 나니 내 순례길도 끝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길 위에서의 31일이 추억이 되었다.

일몰


그다음 날! 피스테라도 이동했다. 피스테라에도 0km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이야말로 화살표도 없는 0km 비석이다. 순례자들의 진정한 종착지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묵시아보다 피스테라에 간다. 또 피스테라 0km 비석까지 버스로 데려다주는 여행사를 통해서 많이들 가지만, 나는 이곳도 두 발로 찾아갔다.


그런데 나에겐 0km 비석이 있는 위치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끝까지 걸었다. 세상 끝에 그 비석이 있다고 하니 끝까지 가보면 나오겠지. 피스테라 마을에 도착해서 그 마을 끝까지 일단 갔다. 순례길 지도를 알려주는 어플에도 길이 여기까지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돌아봐도 비석이 없었다. '아! 묵시아에도 성당 근처에 0km 비석이 있었으니 피스테라 0km 비석도 저 위 성당에 있다보다' 하고 또 성당까지 걸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없었다. 계속 주위를 둘러봤는데 저 멀리 비석하나가 보였다. 0km 비석인 줄 알고 기분이 좋아서 미소를 지으며 걸어갔다. 그런데 뜬금없이 3km가 적혀 있었다. (???)


잠시 이게 무슨 비석인가 생각하며 화살표 방향으로 주위를 둘러봤는데, 저기 절벽에 가까운 해안 오솔길로 사람들 몇 명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3km를 또 걸어야 하나보다.... 그래서 나도 그 오솔길로 걷기 시작했다. 이 길이 맞는지 반신반의하며 지도를 봤다. 지도를 보니 정말 내가 점점 세상 끝, 땅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로 세상 끝에 있다고...?'


오후 4시쯤, 아직도 세상 끝을 향해 걷고 있었다. 너무 힘들었다. 그냥 돌아갈까 생각이 들 때쯤 내 옆으로 버스 몇 대가 지나가 주차를 했다. 도착이다. 0km 비석은 저 멀리 절벽 끝에 화살표도 없이 서 있었다. 정말 세상 끝에 있었다. 그 바다 앞에 있는 0km 비석 앞에 서서 "아,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말이 튀어나왔다.

세상 끝




나에게 이 말은 단순히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한국에 지친 내가 도망치듯 아일랜드로 떠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돌아가도 무엇을 해야 할지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는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랬던 내가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니.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할지 정했냐고? 아니다. 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돌아가고 싶었다. 이런 상태로 한국에 돌아가도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회복되었다. 산티아고가 나에게 준 선물이다. 세상 끝에서 세상으로 나갈 마음을 움켜쥐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Tip_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완주 후

순례길의 도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완주하신 걸 축하드려요. 두 발로 그 긴 여정을 완성하신 것을 기념하고 만끽하시길 바라서 이 Tip을 준비했습니다.
1. 산티아고에서 기념하기.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대부분 콤포스텔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려요. 미사를 드리고 야보고의 무덤을 본 답니다. 일반 관광객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지만 순례자들은 무료로 미사 때 성당에 들어가서 미사 드리고 야고보 무덤을 볼 수 있어요. 성당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는 광장에서 성당을 바라보고 성당 오른쪽으로 둘러서 기념품 가게 입구를 지나 걸어가면 입구가 있어요.
2. 묵시아나 피스테라 가기. 0km 비석을 보고 순례길을 마무리하면 감회가 색다릅니다. 본문에 나와 있듯이 0km는 순례자들이 더 이상 걸을 곳이 없는 진정한 종착지이니까요. 묵시아, 피스테라 모두 추천하지만 시간적 여유로 한 곳만 가야 한다면 여러분 취향에 맞는 한 곳을 선택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먼저, 피스테라는 0km 비석까지 버스를 타고 투어 할 수 있어요. 또한 비석에 화살표도 그려져 있지 않는 완전한 '끝'입니다. 그리고 그 비석 앞에 바가 하나 있어요. 기념적인 곳에서 식사까지 마무리할 수 있답니다.
다음 묵시아는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에요. 피스테라는 관광지의 느낌이 남아있다면 묵시아는 사람도 많이 없어 관광지의 느낌이 덜 하답니다. 0km 비석이 묵시아 마을의 언덕 위에 있어서 조용하게 순례길을 마무리할 수 있어요.
기념적인 의미를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면 피스테라를, 평화롭게 순례길을 마무리하고 싶다면 묵시아를 추천드려요.
3. 다른 관광지 여행하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고 마드리드나 포르투갈로 넘어가 여행하기도 해요. 산티아고 도시에서 근사한 옷 하나를 구입하시고 여행으로 즐거운 마무리를 할 수 있답니다.

마지막까지 즐거운 순례길과 여행되세요.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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