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의 인생 책, 못생긴 그녀를 사랑한 남자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by 사막여우

배우 박정민이 20대의 인생 책으로 꼽으며, 그 시절 내내 품에 안고 살았다는 소설이다.

구조가 특이하다. 무엇보다 문체가 굉장히 산만하다. 처음에는 이북으로 읽기 시작했으나, 지나친 산만함에 결국 종이책으로 다시 읽었다.


누구나 그럴 듯한 학교를 나오고, 그럴 듯한 직장을 얻고, 그럴 듯한 차를 굴리고, 그럴 듯한 여자를 얻고, 그럴 듯한 집에서 사는... 그럴 듯한 인간이 되고 싶은 시절이었다. 그럴 듯한 인간은 많아도 그런, 인간이 드문 이유도... 그럴 듯한 여자는 많지만 그런, 그녀가 드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럴 듯한 것은 결코 그런, 것이 될 수 없지만. (p196)


결국 열등감이란

가지지 못했거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의 몫이야. 알아? 추녀를 부끄러워하고 공격하는 건 대부분 추남들이야. 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인 거지. 안 그래도 다들 시시하게 보는데 자신이 더욱 시시해진다 생각을 하는 거라구. 실은 그 누구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데 말이야. 보잘것없는 여자일수록 가난한 남자를 무시하는 것도 같은 이유야. (p220)


왜 인간은

살아갈 수 없는 걸까. 그냥... 스스로의 삶을 살지 않고, 자신보다 못한 타인의 약점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것인가... (p235)


박정민의 에세이 '쓸 만한 인간' 을 읽을 때 문체가 참 독특하다고 생각했었다. 문장 구조가 파괴된 날것의 문장들,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는 서술. '쓸 만한 인간' 이 그의 20대 시절 기록이니, 이 소설 속의 산만하고 파격적인 문체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의 첫 챕터 주제이자, 표지인 벨라스케스의 '시녀들(Las Meninas)'이다. 이 그림은 이 책 만큼이나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마드리드 궁전에 있는 큰 방이다. 그림의 중심에는 마르가르타 공주가 있다. 그 곁으로 시녀들과 궁정 광대인 두 명의 난쟁이, 그리고 개가 있다. 거대한 캔버뒤에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벨라스케스 자신이 있다.


시선은 엇갈린다. 공주 뒤편 거울 속에는 왕과 왕비가 비친다. 아마도 벨라스케스는 왕과 왕비를 그리는 중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시점은 왕과 왕비의 시선이 된다. 열린 문 뒤의 남자까지 더해져 공간은 무한히 확장된다. 등장인물들의 시선은 모두 제각각이다.

도대체 이 그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화면 중앙의 공주인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가, 거울 속의 왕과 왕비인가, 아니면 제목처럼 시녀들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가장자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난쟁이인가.


거창한 제목과 복잡한 그림에 비해, 작가가 말하는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다. 지독하게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이야기. 그렇다면 이 소설의 주제 의식은 그림 속 난쟁이와 연결될 지도 모른다. 책 표지 속 그림에서는 난쟁이가 가장 크게 보인다.


등장인물 역시 단출하다.

나,

그녀,

그리고 요한.

이 세사람은 각자의 결핍으로 서로에게 연결된다.

화자인 나는 잘생긴 아빠와 못생긴 엄마가 있고,

요한은 돈많은 아빠와 예쁜 엄마가 있다.


소설은 대부분 화자인 '나'의 독백으로 채워진다. 말줄임표 외에는 문장부호조차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화마저도 따옴표 없이 길게 늘어진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만년체로 주저리 주저리 두서없이 쏟아낸다. 이 문장들은 화자의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본인도 스스로의 감정을 명확히 알지 못하는 무심하고 혼란스러운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음울하다.


외모가 곧 경쟁력이며, 유난히 외모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박정민의 표현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사랑과 열등감에 관한 내용이다. 그가 노개런티로 참여했던 영화 '얼굴' 과도 주제가 비슷할 수 있다. 그는 이런 결핍과 소외에 대한 주제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주요섭의 단편소설 '추물'이 생각났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유명한 주요섭이지만 내게는 추물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 언년이의 외모 묘사는 잔인할 정도이다.

얼굴이 얽어도 아주 지독하게 얽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뼈대며, 그 위에 숭굴숭굴 뚫어진 구멍이며, 그야말로 밤송이를 까 놓은 것 같았다. 눈은 뱀눈 같이 째지고, 코는 주먹코요, 입술은 썰어 놓은 순대 토막 같았다.머리는 돼지 털 같이 뻣뻣하고 숱이 많았다.

언년이에 대한 묘사를 읽다 보면, 작가가 못생긴 여자를 혐오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언년이는 단지 외모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한다. 이 소설 속의 '그녀' 또한 마찬가지다. 화자인 '나'가 진심으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사랑을 의심하고 끊임없이 두려워한다. 그런 그녀의 방어적인 태도가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어 마음이 아팠다.


이 소설은 '파반느'라는 제목의 영화로 올해 개봉될 예정이라고 한다. 작품 속에서 나와 그녀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유일하게 이름이 있는 '요한'의 역할에 변요한이 캐스팅 되었다고 해서 웃겼다. 이름 때문인가. 그래도 그 역할에 꽤 잘 어울린다. 그런데 '그녀'가 고아성이라고? 고아성이면 미인이지 않은가. 여배우 중에서는 추물이란 말인가. 소설 속 서사의 압도적인 추함을 영화에서는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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