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 의궤
아이의 방학 동안 목요일은 박물관의 날이다. 목요일은 아이의 스케줄 중 가장 한가하고, 월요일처럼 휴관일도 아니며, 주말과 겹치지도 않아 박물관을 방문하기 좋은 날이다. 아이는 박물관을 무척 좋아한다. 폭염이 몰아치는 여름방학이나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방학에도 박물관만큼 좋은 곳은 없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이다. 나 역시 이곳을 좋아한다. 볼거리가 많고, 무엇보다 무료로 개방되어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그래서 이번 방학 첫 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정했다. 한강변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도 좋고, 주차도 꽤 편리하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어린이박물관이 필수 방문 코스였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시시해하기 시작했다. 이제 예비 초3이니 어린이박물관은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국립중앙박물관 본관은 1층에는 역사관, 2층에는 국보급 유물 전시, 3층에는 세계미술 전시가 주를 이룬다. 이곳은 자주 방문했던 곳이라 못 본 전시 위주로 관람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상징과 같은 경천사 십층석탑은 1348년에 건립된 고려시대 대리석 탑이다. 이 탑을 본떠 만든 것이 탑골공원에 있는 조선시대 원각사지 탑이다. 우리나라 탑의 전형적인 예를 들자면 석가탑을 떠올리게 되지만, 경천사 십층석탑은 전통적인 탑과는 다른 특징을 지닌다. 고려 말기에 원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대리석을 재료를 사용한 점도 특이하다. 대리석은 섬세한 조각이 가능하게 해 주는데, 이는 단단한 화강암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또한 우리나라 탑은 주로 3층, 5층, 7층 등 홀수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해, 경천사 십층석탑은 짝수인 10층탑이다.
아이가 10층이 아니라 13층 같다고 말했다. 아래 3개 층은 기단부에 해당하고, 탑신부는 몸돌에 지붕이 있는 부분부터 시작된다. 탑신부의 층수에 따라 총층수가 결정된다. 경천사 십층석탑은 큰 지붕 3층, 작은 지붕 7층으로 총 10층이다.
이 탑은 1907년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18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일본의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의 요구와 국제적인 여론에 의한 것이다. 데라우치는 조선이 영원히 일본의 식민지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일본으로 반출하기보다는 본인이 총독으로 있는 조선 땅에 두려고 했다. 데라우치는 '데라우치 문고'로도 유명한데, 많은 한국의 고서화와 고서를 일본으로 반출한 인물이다. 즉, 우리에게 돌려주려는 것이 아니라, 조선이 일본땅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경천사 십층석탑은 우리 땅에 남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박물관 설립 계획 단계부터 이 탑을 로비에 두겠다는 의도가 있었고, 박물관 공모 당시 그 조건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박물관 오픈 시간에 도착했다. 로비를 둘러본 다음, 바로 3층 세계문화관으로 갔다. 세계지리에 관심이 많은 아들 때문에 꼭 세계문화관을 들르게 되는데 상설전시관이어도 전시 내용이 자주 교체되어서 매번 방문해도 새로운 전시가 있어서 좋다. 지금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중심으로 전시를 하고 있다. 초등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주제라 그런지 어린이용 사설 전시해설팀이 많이 있었다.
전시에 대해 상세한 설명이 담긴 브로셔가 배치되어 있었다. 삼등분으로 나누어 접으면 딱 좋은 사이즈이다. 아들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브로셔만 가지고 혼자서 잘 감상했다.
한쪽 벽면에는 폼페이 벽화 몇 장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AI로 구현하여 인물들이 움직인다.
아침 일찍 서둘러 나와서 아침 식사도 못했고, 피곤했다. 경천사탑 뒤쪽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이날 한파로 몹시 추웠지만 내부에 식당이 있어 참 좋다. 창 밖으로 야외 전시가 보이고, 햇살이 따뜻하다.
현재 특별전으로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과 '고려 상형청자'가 열리고 있다. 비엔나 전시도 보고 싶었지만,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작품은 선정적이거나 충격적인 요소가 많아 아이가 무서워할 것 같아 상형청자 전시를 보기로 했다.
청자 전시는 온라인으로도 예약할 수 있지만, 현장 예매도 어렵지 않다. 이번 전시는 고려청자 중에서도 상형청자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동식물, 인물 등 특정 형태를 본떠 만든 청자를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에서는 모든 상형청자를 한자리에 모았다고 한다.
고려청자의 변천사는 초기, 순청자 시대, 상감청자 시대, 쇠퇴기 총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 제2기에 해당하는 순청자 시대에 특히 상형청자가 많이 제작되었다. 제3기에 해당하는 상감청자 시기에는 청자 표면에 문양을 음각하고 백토나 자토를 채워 넣어 만들기 때문에 순청자에 비해 비색이 덜 강조된다. 즉, 순청자 시기는 고려청자의 비색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려청자이다. 이 작품은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상형뿐 아니라 음각, 양각, 투각, 퇴화, 상감, 첩화 등 다양한 기법이 총동원되어 정교한 기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동화 기법으로 연꽃무늬를 새겨 넣은, 고려청자 표주박 모양 주전자이다. 동화 기법 청자 중에서도 대표적인 작품으로, 붉은 무늬가 청색과 보색을 이루며 시각적으로 화려하여 강렬한 인상을 준다.
아이가 특히 좋아했던 사람모양 주전자이다.
귀여운 두꺼비모양 벼루이다. 벼루가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를 위해 일반적인 벼루 사진을 찾아 보여주며 비교해 줬다.
깨진 도자리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깨진 형태를 통해 내부 단면을 확인할 수 있어 도자기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분석이 가능하다고 한다.
오후 1시에 대표유물해설을 듣기 위해 갔다. 박물관 내 전시 해설은 대표유물해설, 각 전시관별 해설, 외국인을 위한 해설 등 세 가지로 제공된다. 외국인을 위한 해설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지만, 한국인을 위한 해설은 한적했다. 아들과 나, 그리고 다른 한 분, 총 세 명이어서 여유 있게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도슨트 분이 매우 열정적으로 해설해 주셔서 듣기 잘 했다고 생각했다.
대표유물해설은 도슨트 분의 성향에 따라 여러 전시관을 이동하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유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대한제국실을 시작으로 신라관을 거쳐 기증관, 서화관을 끝으로 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이 청동 투구는 손기정 선생님이 기증한 유물로, 기원전 6세기 무렵 그리스에서 제작된 것이다. 평소 기증관은 자주 방문하지 않기 때문에 대표 유물 해설을 듣지 않았다면 이 유물을 놓칠 뻔했다. 이 청동 투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수여된 부상이었다. 유물을 부상으로 주는 발상이 독특하다. 당시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가 받아야 했지만, 일제 강점기의 현실 속에서 전달되지 못하고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박물관에 50년 동안 보관되어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손기정 선생님은 여러 방법으로 이 투구를 돌려받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198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마침내 투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외규장각 의궤이다. 2011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에 약탈당한 조선왕조 외규장각 의궤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대한민국으로 귀환되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의궤를 주제로 여러 차례 특별전을 개최했었고, 이번에 의궤실을 새롭게 조성하여 작년 말부터 2층 서화실에 전용 공간을 마련했다. 어렵게 돌아온 의궤가 드디어 독립적인 공간에서 상설전시하게 된 것이다.
전시 공간 디자인도 훌륭했다. 특히 입구 부분이 인상적이어서 관람객들이 여기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프랑스 도서관 측에서는 의궤의 낡은 표지를 뜯어내고 현대 직물로 교체했다.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유물인지 모르고, 단지 낡았다고 쉽게 교체해버린 상황이 안타깝다. 다행히 원본 표지가 남아 있어 이를 전시할 수 있었다. 낡은 표지에서 오랜 시간 해외를 떠돌았던 우리 의궤의 고난이 느껴진다. 또한, 이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프랑스인들이 붙여놓은 'chinois(중국)' 스티커도 볼 수 있다.
외규장각 의궤의 중요한 특징은 대부분이 국왕의 열람을 위한 ‘어람’용 의궤라는 점과, 단 1부만 전해지는 유일본 의궤 29 책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의궤는 주로 관 보관용이었으나, 어람용 의궤도 별도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관용 의궤도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판화로 찍어 표현하였지만, 어람용 의궤는 화원이 직접 그렸고, 글씨도 가장 뛰어난 서예가가 썼다. 어람용 의궤이므로, 왕의 서고를 모티브로 전시 공간을 디자인했다.
전시해설이 끝나고, 서화관을 찬찬히 다시 둘러보고, 매번 가는 사유의 방을 들렀다.
사유의 방은 넓은 공간에 반가사유상 두 개만 놓인 미니멀한 전시이다. 이 연출방식이 참 마음에 든다. 이 공간에 들어오면 저도 모르게 숙연해지는데, '사유의 방'이라는 이름과 너무 잘 어울린다. 왼쪽 화려한 관을 쓴 상은 금동일월식삼산관미륵반가상(6세기말), 오른쪽 간결한 관을 쓴 상은 금동삼산관미륵반가상(7세기 초)이다. 오른쪽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국보 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과 형태가 유사하여 일본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서관이 있다고 하는데 가 본 적이 없어 이번에는 도서관을 방문했다.
이곳은 학술용 서적을 보관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일반 서적이나 아동용 도서는 비치되어 있지 않다. 또한, 관외 대출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각 나라의 도록을 보는 재미가 있다.
15:00 출발
3시 정각, 박물관을 출발했다. 파워 J엄마는 오늘 계획도 클리어했다. 다음 주 목요일은 예술의 전당에서 고흐 전을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