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사람 Jan 24. 2024

예전 같지 않을 수도

수술 준비 끝

12월 7일 화요일 오후

 먼저 뇌혈관조영술 일정이 잡혔다. 뇌혈관조영술은 동맥을 따라 긴 관을 넣고 조영제를 투여한 다음, 뇌혈관을 촬영하는 검사다. 머릿속 지도를 그리는 일인 것이다. 사진으로 종양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술할 때 생길 수 있는 다른 뇌혈관 문제도 대처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동맥을 따라 어떻게 머리까지 긴 관을 넣는다는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남자 간호사가 와서 허벅지 안쪽 사타구니를 제모하겠다고 말할 때야, 비로소 그 긴 관이 허벅지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카테터가 들어가는 위치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뇌까지 이르는 과정을 알 순 없었다.


 도대체 병실에서 내 여린 속살에 있는 털을 어떻게 없앨지, 우려했던 것과 달리 제모는 간단했다. 간호사는 제모할 부위에 로션 같은 액체를 푹 짜더니 '조금 있다가 닦아내세요.'라고 했다. 묻어있는 액체를 닦아낼 때마다 신기하게도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털이 함께 닦여나갔다. 제모가 끝나자 환자이송원이 내가 누운 침대를 통째로 옮기기 위해 찾아왔다. 환자이송원이라는 직업도 병원에 입원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큰 병원일수록 입원병동에서 각 검사실까지 찾아가기 멀고 힘들 뿐 아니라, 걷는 것 자체가 힘든 환자들 역시 많다. 그때 병원 내부 지리를 잘 아는 환자이송원이 환자를 안내한다. 환자를 휠체어 또는 침대에 태우고 이동하기 때문에 안전하게 이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검사 잘 받고 얼른 나으세요.' 하는 한 이송원의 응원은 낯선 검사실 앞에서 큰 힘이 되기도 했다. 병원 의료진이 혈구라면 그들은 혈장이었다.


 국소 마취를 한 왼쪽 허벅지 안쪽으로 카테터가 들어왔다. 사타구니 안쪽 여린 살갗이 뚫리고도 마취 때문에 느낄 수 없었다. 무언가 몸 안을 휘젓는 듯한 느낌이 조금씩 들었을 뿐이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침대 전체를 빙글빙글 돌리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조영제가 투여되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감은 눈앞에, 아니 머릿속에 하얗게 번개가 쳤다. 섬광이 번쩍일 때마다 몸이 불에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가 식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머릿속에서 하얀 플래시가 번쩍거리고, 몸이 뜨거워지기를 여러 번 반복하고서야 검사가 끝이 났다. 침대에 누운 체로 다시 입원실로 돌아가는데, 구멍 난 허벅지에는 지혈을 위한 압박 밴드가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 적어도 6시간 동안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담당 전문의가 찾아왔다. 다음날 있을 수술에 대해 설명하고 동의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는 태블릿 기기로 예상되는 수술과정, 수술 후에 생길 수 있는 후유증, 필요한 회복 기간 같은 것들을 설명했다.

 "환자분 같은 경우에 교수님이 뒤통수 오른편을 절개하실 거예요. 두개골 안으로 들어가서 다른 뇌조직은 건들지 않고 종양 조직만 당겨서 제거하실 겁니다. 들으셨다시피 이 종양은 혈관 뭉치 같은 거라 수술 중에 출혈이 많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귓바퀴 뒤에서 목까지 15~20cm 정도 절개를 할 텐데, 머리카락 나는 라인을 따라서 할 거라 나중에 수술 자국은 거의 안보일 겁니다."

 터무니없게도 마왕이라 불리던 어느 가수를 떠올렸는데, 수술 흉터 위로 타투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혹시 어떤 일을 하시나요?"

 의사가 물었다. 나는 사무직 회사원이라고 했다.

 "다행이네요. 수술 이후에 정밀한 작업은 이전보다 어려울 수 있어요. 소뇌가 관장하는 부분에서 후유증이 발생할 수가 있거든요. 종양 위치가 나쁘지 않아서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되지만, 가능성 있는 후유증에 대해서는 전부 설명을 드릴게요. 설명 들은 후에 수술 동의서에 서명해 주시면 돼요."


 청력이나 시력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든지, 구역 반사에 문제가 생겨서 음식물을 제대로 삼킬 수 없다든지 하는 후유증이 열댓 가지나 있었다. 짧게 끝날 줄 알았던 설명은 거의 1시간 동안이나 이어졌다. 수술 동의서 서명이 끝나자 레지던트 의사가 이발기를 들고 왔다. 머리 전체를 삭발할 필요 없이, 오른쪽 귀 뒤편에서 목까지 절개할 부위에만 머리카락을 자르면 된다고 했다. 머리카락은 금방 잘려나갔다. 잘린 머리카락은 길었다. 어지럼증이 시작되고 일상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미용실을 가지 못한 지 서너 달은 된 것이었다.


 밤이 늦어서야 뇌 MRI 검사를 했다. 수술 직전 가장 최근에 찍은 MRI 영상은 수술할 때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다고 했다. 수술을 할 때 출혈이 많거나 시야가 가려질 경우에 지도가 되는 것이다. MRI 검사실 앞에는 늦은 시간에도 검사를 기다리는 사람이 서넛 있었다. 아픈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아픈 가족을 가진 사람들은 훨씬 더 많았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던 사람도 병원 검사실 앞에 어른거리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사람은 어리석어서 무엇이든 직접 겪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죽도록 아프고서야 건강 그 자체로 감사할 이유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랬다.

작가의 이전글 각각의 입원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