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양육자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
아이를 만나다 보면, 우리는 흔히 ‘부모님’ 혹은 ‘보호자’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병원에서도, 기관에서도, 심지어 상담 서류 상단에도 어김없이 적히는 말이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호자란 꼭 ‘부모’여야 할까?
예전에는 어머니가 집에서 아이를 전담하여 돌보는 일이 많았기에, ‘엄마 = 주양육자’라는 인식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아이를 하루 종일 돌보는 사람이 아빠인 경우도 있고,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를 케어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니 이제는 이렇게 말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주양육자’는 아이와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누구든, 아이의 하루를 함께 살아가는 존재. 작은 변화에 마음이 흔들리고,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민하는 사람. 그리고 ‘우리 아이는 어떤 걸 좋아할까’, ‘이건 왜 이런 걸까’를 제일 먼저 궁금해하는 사람.
나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을 하면서, 그 아이의 주양육자를 꼭 들여다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 아이의 하루를, 감정을, 성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이니까.
상어를 유독 좋아하는 한 아이.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자리에 앉는 것도 어려워했고, 발화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먼저, 그 아이의 엄마를 기억한다.
처음부터 단단한 분이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고, 아이에게 지금 어떤 중재가 필요한지를 빠르게 파악하고, 즉각적으로 실천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도 건강하셨다. 마음도, 몸도. 운동을 좋아하셨고, 항상 환하게 웃으며 아이와 함께 센터에 들어서곤 하셨다. 엄마가 먼저 밝으니 아이도 덩달아 눈빛이 반짝였고,
하루하루가 조금씩 달라졌다. 앉아 있는 시간도 늘었고, 처음에는 말없이 손가락으로만 가리키고, 칭얼거리는 아이었지만, 아이가 점차 한단어, 두단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성장은 어쩌면, 그 단단한 엄마로부터 출발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를 포기하지 않고, 다독이며, 기다려준 그 마음에서.
물론, 모든 주양육자가 그렇게 단단한 건 아니다. 실제로는, 아주 작은 말 한 마디에도 마음이 무너지는 분들이 훨씬 더 많다.
“왜 우리 아이만 말을 못할까?”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치료실에 왔으니, 이제 잘 되겠지?”
그 조급한 마음이 전해질 때, 나는 마음이 복잡해진다. 조금만 기다리면 괜찮아질 거라는 걸, 하지만 그 ‘조금’이 너무도 고된 시간일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서다.
어떤 부모님은 치료실만 다닌다고 안심하고, 어떤 부모님은 가정에서는 전혀 실천을 하지 않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느린 아이라는 것을 회피하기도 한다. 그럴 땐 ‘어떻게 용기 내어 말을 건네야 할까’, ‘어떻게 같이 으쌰으쌰할 수 있을까’를 한참 고민하게 된다.
중재는 아이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아이 옆에서, 함께 걸어가는 어른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 어른이 혼자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
예전에 한 아이가 색깔 변별이 잘 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던 적이 있다. 이유가 너무 궁금했지만, 부모님이 말을 꺼내시지 않아 조심스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중재를 시작하고 한 달 후, 주양육자와의 상담에서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보았을 때
“아, 할아버지가 색맹이셔서 그런 영향이 있을지도 몰라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한마디로, 우리도 전혀 다른 방향의 중재를 해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부모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어떤 이야기든 공유해주세요. 그래야지, 저희가 더 효율적으로 프로그램을 계획할 수 있어요.”
조기교실에서 함께했던 또 다른 아이는 아직 발화가 없었다. 그 아이의 주양육자였던 어머니는 매 수업마다 아이의 하루를 기록해왔다.
주말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침에 뭘 먹었는지, 기분은 어떤지.
그 작은 기록 하나하나가 중재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아이의 관심사를 알 수 있었고, 좋아하는 장난감으로 강화제를 구성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엄마도, 때때로 불안에 흔들리곤 했다.
작은 변화에도 가슴을 졸이고, 더 나은 방향임에도 쉽게 안심하지 못하는 모습.
그래서 나는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한다. 그 말이 때로는 위로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걱정하지 않으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말일 수 있어서.
그래서 오늘도 나는, 조심스럽게 함께 간다.
느린 아이와 함께 걷는다는 건, 그 아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뜻이다. 나는 모든 주양육자분들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분들이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지,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자주 지치고 흔들리는지를 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심스럽게,
아이 곁의 어른에게 말을 건넨다.
“양육자분께서는 이미 아이에게 가장 큰 선물이고 행복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