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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빈 Your Celine Dec 18. 2020

낯선 아이를 데려다주었다

아직 세상은 그리 화창하지만은 않기에

  며칠 새, 살을 에는 추위가 밤거리를 지배했다. 늦은 8시가 지난 시간 일을 마치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내가 타야 할 버스는 야속하게도 배차간격이 길다. 운이 나쁠 땐 20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날은 27분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극단적인 배차간격은 어떻게든 피하는 게 옳다. 더군다나 이렇게 추운 날씨는 상황판단이 빠를수록 좋다. 건너편 버스정류장으로 가면, 조금 더 걸어야 하지만 집 근처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다른 정류장으로 향하려던 순간, 휑한 버스정류장에서 울먹이는 아이의 소리가 발걸음을 붙잡았다. 


"27분을 어떻게 기다려..흑.."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아이의 혼잣말을 혼잣말로만 둘 수 없었다. 고작 10살이 채 안되어 보였다. 

눈이 마주친 아이에게 물었다. 


"춥겠다. 어디 가는 거야?" 


집에 엄마를 만나러(?) 간다는 아이. 할머니 댁에서 사는데 엄마 집에 가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어떤 사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이의 집은, 정확히 아이의 엄마의 집은 우리 집에서도 한참 더 가야 하는 거리였다. 게다가 환승도 해야 한다. 그 정류장에서만 내리면 가는 길을 알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이 정도 거리를 이 시간에 아이 혼자 가도록 내버려 둔다고..?' 

갖은 의문이 들었지만 아이를 두고 나만 추위를 피할 순 없었다. 아이에게 할 말을 잠시 고르고 말을 건넸다.


"언니랑 가는 방향이 같은데 같이 갈래? 여기서 건너편 버스를 타야 하는데, 이렇게 이렇게 가면 돼." 


어렸을 적, 아는 길이지만 다른 상황에 공포심을 느껴본 경험이 있다. 이 아이는 지금 낯선 사람의 친절이 반가우면서도 두려울 거란 추측이 강하게 들었다. 경계심을 없애기 위해 길 찾기 어플을 보여주며 과하게 친절한 모습은 절제했다. 울먹임을 그치더니,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였다. 아이들을 많이 접해온 경험이 있다. 그러나 처음 만난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낯선 아이를 오른편에 둔 채 속도를 맞춰 걸으며 생각했다. 데려다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과 나는 악한 사람이 아니지만,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접근했다면 어쩌려고 이렇게 덜컥 따라오는 건가라는 두 가지 모순되는 마음이 겹쳐 들었다.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 돼!'라는 말은 지금 너무 안 어울리는 듯싶어 넣어두었다.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괜한 걱정도 들고, 생각을 하다 하다, 이러다 내가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라는  망상에도 이르게 되었다. 어쨌든, 아이를 데리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는 자리가 많았다. 아이는 1인석에 앉았다. 나는 그 뒤에 앉아 아이를 잠시 바라봤다. 

유독 아이들에 약하다. 이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혼자 다니다 길이라도 잃으면 어쩌려고 이러나.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몇 번 정도 흘끔 뒤를 돌아보는 아이였다. 


첫 번째 버스에서 내리고, 두 번째 버스를 탔다. 여전히 버스에는 자리가 많았다. 아이는 또벅또벅 걸어가 2인석에 앉았다. 나에게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그 사실에 잠시 기뻤는지 오지랖이 터져 나왔다. 


"다음에는 혼자 늦게 다니면 안 돼..ㅠㅠ 언니도 혼자 다니면 무서워! 알겠지?" 


그 말에 아이는 끄덕이며 낮에는 간 적이 있는데 밤에는 처음 오는 거라며 옹알옹알 답했다. 

그렇게 버스는 달렸고 너무 멀리 갈 수 없어 아이가 내리기 전 정류장에서 내렸다. 내리기 전까지도 이제 벨을 누르고 내리라고 일러주었다. 


멀어지는 창문으로 아이는 내가 사라질 때까지 작은 손을 천천히 흔들었다. 

눈빛에 고마움을 전해받았다.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아이. 이 아이를 이토록 불안한 마음으로 보내는 이유는 아직 세상이 그리 화창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상대로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감히 인간이라 칭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드물게 존재한다. 며칠 전, 뉴스에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분노를 안겼던 범죄자가 출소했다. 형량은 곧 범죄의 죗값이 아니었나. 그 죗값은 언제쯤 대중이 수긍할 수 있을까. 가슴에 피멍이 들어버린 사람들의 눈물자국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겼다. 방금 전에도 아내를 살해한 남편이 10년형을 구형받았다는 뉴스를 접했다. 아직도 살인의 죗값이 고작 10년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니 서늘하다.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질수록, 약자가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는 인식이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인식보다 설득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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