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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an 21. 2024

바로 서야 할 단 한 명을 고르자면 그건 바로, 나였다

제1장. 2020년 11월, 31살에 멈춰버린 오빠의 시간(7)

떠나간 이들을 위하여, 남겨진 이들에게

초안, 날것 그대로의 문장들



오빠. 오빠를 떠나보내고 나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아졌어. 왠지 저 하늘에 오빠가 있을 것만 같아서. 하늘이 맑은 날이면, 오빠가 오늘은 기분이 좋나하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고, 하늘이 흐리면 오늘 오빠 기분이 안좋나하고 괜히 걱정이 되는 거 있지. 요새는 날이 많이 흐려서 괜히 걱정이 돼. 혹시 뭔 걱정이 있나, 마음이 불편한 건 아닌가, 하고. 오빠. 오빠의 날씨는 맑음, 흐림일 수는 있어도, 오빠의 계절은 봄이길 바라. 너무나도 시리고 혹독한 겨울을 지내온 오빠이기에, 그 겨울이 지나고 봄날의 따사로움에 영혼의 평안을 얻길 바라. 우리 가족은, 아직 초봄을 맞이하는 중인 것 같아. 그렇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봄을 맞이 하겠지. 그렇기에, 오빠가 먼저 봄의 정원에서 기다려줘. 그곳에서 먼저 자리 잡고 따사로운 햇살과 푸릇푸릇한 생명들을 즐기며 우리를 기다려줘.



바로 서야 할 단 한 명을 고르자면 그건 바로, 나였다.



방향을 잃은 억울한 마음


 오빠의 짐을 정리하고 다시 수원으로 돌아왔다. 용달차 한 대와 아빠 차에 가득 실린 오빠의 짐. 덜어내고 덜어내도 차마 덜어낼 수 없는 것들을 그러모아 챙겨 온 것들. 대형 마트에서 사용하는 카트를 경비실에서 빌려왔다. 그리고 짐을 차곡차곡 쌓아 집으로 향했다. 경비원분이 물었다. 누가 이사 왔나 보다고. 우리는 멋쩍게 웃었고, 엄마는 타지에 살던 아들의 짐을 본가에 가져다 둔다는 말을 끝으로 대화를 회피했다. 서로에게 다른 의미였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틀린 게 없었다. 오빠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하늘나라로 이사를 간 것이었다. 새로 이사 간 곳은, 가지고 있던 짐들을 챙길 수 없는 곳이기에 짐을 본가에 옮길 수밖에 없는 거고. 그때의 난, 아마 속이 많이 상했던 듯하다. 그 물음과 그 대답 자체가 아닌, 그냥 그 상황 자체에. 오빠는 더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이 상황과, 세상을 떠난 오빠의 짐을 옮기고 있는 그 상황 자체가.


 카트를 끌며 아파트 공동 현관으로 들어가는 도중, 동 주민의 신발 끄트머리가 카트에 밟혔다. 신발을 밟힌 그분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쳐다봤다.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지만, 억울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잘못한 상황이 분명했고, 그분은 충분히 불쾌함을 느낄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미 속이 잔뜩 상한 마음 탓에 작은 일에도 억울했다. 찌푸려진 그 얼굴에 대고 소리치고 싶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상황을 겪고 있는 줄 아냐며, 이 짐이 어떤 짐인 줄 아냐며. 내가 뭘 그리도 잘못한 거냐고. 왜 이리도 세상은 내게 모질기만 한 것이냐고. 왜, 조금의 따뜻함조차 나누어주지 않냐고. 그저 발이 밟혀 인상을 찌푸리는 그 사람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리도 억울했을까, 하는 생각이지만 그때의 나는 어디에든 소리치고 싶었나 보다. 왜 오빠가, 우리 가족이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하냐고.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 왜 이리도 모진 시련을 겪어야 하냐고.

오빠, 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장례식과 오빠의 짐 정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각종 행정적인 절차들이 ‘유가족’이 되어야 했던 우리를 독촉했다. ‘아들의, 오빠의 죽음을 직시하고 이 문제들을 빨리 처리하라고’. 오빠의 유산을 처리해야 했고, 오빠가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 절차를 밟아야 했고, 오빠의 사망신고를 해야 했다. 조금은 복잡한 문제들이 끼어있었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사후의 절차들은, 오빠의 상황을 가장 현실적으로 직시했던 아빠와 언니가 맡았다. 아빠와 언니가 법무사를 만나며 오빠의 죽음을 온몸으로 깨닫고,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시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나는 오빠의 상황에 대해서도, 그런 쪽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그저, 아빠와 언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족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현실에 무력함을 느끼며.

 오빠의 외장 메모리에 있던 사진들을 내 노트북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사진들 중, 오빠의 납골당 안에 넣어줄 것들을 골랐다. 수천 장의 사진들을 넘기며,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시간들의 오빠를 보았다. 웃고 있는 오빠, 늠름한 오빠, 찡그린 표정의 오빠, 장난꾸러기 같은 오빠. 어린 시절의 오빠, 청소년기 시절의 오빠, 대학생의 오빠, 직장인의 오빠.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 다채로운 감정을 담고 있는 사진 속 오빠에게 수십 번을 되물었다.  

오빠, 난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

오빠를 위해서, 우리 가족을 위해서 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항상 이성적이고 똑똑했던 오빠였잖아. 언제나 해답을 내놓던 오빠였잖아.

오빠, 제발 답을 알려줘.

 대답이 없는 사진 속 오빠를 향해 간절하게, 한참을 물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오빠가 담겨있는 노트북 화면을 보다 고개를 들어 거실을 봤다. 무너질 대로 무너진 가족이 보였다. 항상 미안하고 고마웠던 첫째를 잃은 엄마와 아빠. 때로는 오빠였고, 때로는 부모였고, 때로는 친구였던 오빠를 잃은 언니. 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오빠를 위해서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뭘까. 내가 어떻게 해야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비탄에 휩싸인 가족들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작은 모래알에도, 그 작은 꺼끌꺼끌함에도 생채기가 나던 나약해진 감정이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이토록 무너진 가족들 사이에서, 바로 서야 할 단 한 사람을 고르자면 그건 나였다. 슬픔이라는 단어로는 차마 다 표현할 수 없는, 비통에 빠진 가족들 사이에서 정신을 차려야 할 사람을 단 한 사람 고르자면 그것도 나였다. 무너진 가족들을 다독이고 일으켜야 할 단 한 사람을 고르자면 그것도 나였다. 가족들 사이에서 오빠와 유대감이 가장 적었던 사람을 꼽자면 나였다. 오빠가 마지막 삶의 끈을 놓을까 망설일 때, 그 끈을 같이 붙잡아주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나였기에.


가족을 외면했던 벌을 받는 걸까.


 오빠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절규했던  2020년 하반기, 그때 나는 집을 나가 있었다. 아빠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말과 행동을 주고받은 이후,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아 날 괴롭히던 ‘가족’이란 공동체를 잘라내기로 다짐했다. 아주 기본적인 인륜의 도리만 지킬 뿐, 더 이상 이들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을 거라고. 그 길로 집을 나가 친구네 집에서 살고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으로 전환된 3학년 1학기 수업과 공무원 시험을 같이 준비하던 기간이었다. 공시생이었던 내가 공부하며 생활비로 사용할 수 있었던 돈은, 엄마가 어렵게 벌어 매달 보내주던 30만 원. 그 돈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고, 한 권에 이삼만 원이 넘는 책을 한 달에도 몇 권씩 사야 했고, 스터디 카페를 끊어 공부를 해야 했다. 거기에 공부에 필요한 각종 문구류까지 사려면 빠듯해도 너무 빠듯했다. 하루에 내가 식비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은 단돈 오천 원이었다. 점심에는 이천 오백 원 남짓하던 샌드위치 하나, 저녁에는 이천 원 남짓한 김밥 한 줄. 치킨이 먹고 싶은 날엔 점심저녁을 삼각김밥 하나로 때우며 그날의 식비를 아껴 양념치킨 맛 과자를 사 먹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만 원 남짓한 트레이닝복 바지 하나를 사려고 해도 몇 날 며칠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고민했다. 그러다가 결국 돈이 아쉬워 보풀이 일어날 대로 일어난 바지를 주워 입고 스터디 카페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아침에 스터디 카페에 도착해서 한 시간가량 무인 스터디 카페 청소 알바를 하며, 학교 수업을 듣고, 남는 시간을 일분일초 아껴 공부하던 그때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으로 내몰린 나는, 가족들이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다. 이놈의 집구석, 빨리 시험에 합격해서 독립하는 것밖에 눈에 뵈는 게 없던 시기였다. 내게 가족은, 멀면 멀수록 좋은 것이었다. 당연히 가족들의 연락은 거의 무시하다시피 했고, 그런 내가 힘들었던 가족들의 상황을 알 리 없었다.

 오빠의 일이 있고 난 후에야 2020년 하반기의 우리 가족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연을 끊겠다고 다짐하며, 가족들의 연락은 거의 무시했다. 그러 간간히 엄마와 안부인사만 주고받았을 뿐. 가족들은 그런 나를 보며 구태여 가족의 상황을 전하지 않았다. 절규하며 죽음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오빠를 구할 방법을 찾고, 오빠를 어르고 달래며 온 가족이 힘들어하던 시기에, 나는 잔뜩 독기가 올라 공부만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나 하나 살겠다고. 그랬던 나는, 오빠의 죽음 앞에서 다른 가족들처럼 무너져 있을 자격조차 없었다. 내 슬픔보다는, 내 마음보다는 오빠와 가족이 더 중요했다. 무너지려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애써 감췄다. 그때, 가족을 외면했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가 내리는 형벌이었다. 가족을 외면했던 나는, 지금 무너져 내린 가족의 지지대가 되어야 한다고. 너는 그래야만 한다고. 너는, 머리는 차갑게 마음은 단단하게 무장한 채 가족들 사이에 우뚝 서야 한다고.

 다시 일어나서 학부생이자 수험생이었던 내 일상을 지켜 나가는 것이 무너진 가족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다. 슬픔에 빠져있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씩씩하게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다시 일어서자고. 우리 다시, 일상을 지켜나가자고.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겪었지만, 꿋꿋이 잘 살아가는 것이 오빠를 위한 일이라고. 우리가 이렇게 무너져 있으면 오빠는 미안해서 하늘에서도 편안하게 있질 못하다고. 우리가 잘 사는 것이 오빠를 위한 일이라고. 오빠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또 하나의 가족이었던 친구 네에 있던 짐을 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오빠의 죽음에 본인 일처럼 아파해주는 친구에게 꼭 씩씩하게, 잘 이겨내서 돌아오겠다며 다짐을 했다. 무너지지 않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였다. 나에게는, 나의 아픔을 본인의 일처럼 아파하고 걱정해 주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가족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다고, 친구들에게 다시 웃으며 돌아가겠다고 다짐하며 삼주 만에 다시 스터디 카페로 향했다.


너무 시린 겨울이었기에, 봄을 가져다주고 싶어서.


 너무 혹독한 겨울이었다. 가족들은 매서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각자만의 동굴로 들어간 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고 했지만, 우리 가족의 겨울은 너무나 길 것 같았다. 다가올 봄은, 너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다가올 봄이 너무 아득해, 겨울이 너무 혹독해 희망의 불씨조차 꺼져버린 가족들을 보며 다짐했다. 내가 우리 가족에게 봄을 가져다주겠다고. 이 겨울이 너무 혹독하다면, 봄을 앞당겨 가져오겠다고. 우리의 봄을 위해서는, 내 합격이 간절했다. 내가 합격한다면, 가족에게 작은 온기라도, 작은 새싹이라도 틔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온기와 새싹을 보고 다가올 봄을 기대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오빠의 마지막 끈을 같이 붙잡아주진 못했지만, 남은 가족의 끈은 내가 잡아줘야지. 두 손의 살갗이 다 벗겨진대도, 그 끈들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도, 그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무감하고 비겁했던 지난날의 속죄라고 생각하며. 씩씩하게 오전 인사를 하며 집 근처 스터디 카페를 향해 나섰고, 밤에 돌아와서는 슬퍼하는 가족들을 달랬다.


 다시 공부하겠다며 스터디 카페로 향했던 결심에는 오빠에 대한 다짐도 컸다. 2020년 하반기,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공부하며 꽤 굳건한 확신이 있었다. 이대로 계속하면 2021년 시험은 분명 합격할 거라고. 합격이 뭐야. 수석이든 차석이든 무슨 ‘석’ 자는 붙이고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오빠의 죽음으로 이렇게 무너져 시험을 망친다면, 비겁한 나는 오빠 핑계를 댈 것만 같았다. ‘오빠 일만 없었다면 합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핑계들이 쌓이고 쌓인다면 나중엔, 원망이 될 것 같았다. ‘오빠, 나 그때 합격할 수 있었는데 왜, 왜 그런 선택을 했어’하고. 오빠의 죽음은 오빠가 이 세상에서 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설만큼 힘들어하던 오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주제에 오빠 핑계를 대고, 오빠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오빠의 마지막 선택을 온전히 존중해 주고 싶었다. 그토록 힘들어하던 오빠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 주지도 못할 거면서 오빠가 그 고통의 수렁에서 계속 삶을 연장하길 바라는 건 그저 내 욕심일 뿐이니까. 오빠가 죽음이라는 선택을 해서 편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였다. 그 선택의 여파는 오빠의 평안을 대가로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오빠의 선택을, 내 실패에 대한 핑계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알던 오빠는, 만약 내가 지금 정신 못 차린 결과로 시험에 떨어진다면 하늘에서도 죄책감에 마음 편히 못 쉴 사람이었으니까. 오빠도, 시린 겨울을 끝내고 거기에서는 따스한 봄을 맞이하길 간절히 소망했다.

매일 스터디 카페를 향하는 길, 오빠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오빠, 지켜봐 줘. 무너지지 않고 우뚝 서서 한 발 한 발 걸어 나갈 나를 지켜봐 줘.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면서 오빠도 꼭 행복해.

오빠가 미안해하지 않게, 가족 걱정하지 말고 하늘에서 마음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나도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합격해서 기특한 동생이 될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거기서 편안히 쉬어.




합격을 향한 여정. 목표는 똑같았다.

그러나 가족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었던 전과는 달리,

오빠를 그리고 가족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수단이 된 이번만은 지칠 수가 없었다.

힘이 들어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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